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시종일관 상반되는 상징으로 읽히는 <윤치호와 김교신>이지만, 그들의 갈등과 다름 사이에서는 ‘공통성과 유사성’도 열려 있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에도 분명 대화의 접점은 있을 것이다."



윤치호와 김교신, 그 접점을 찾아서
<윤치호와 김교신>, 양현혜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 256쪽, 1만 9000원
[234호] 2010년 03월 23일 (화) 15:04:25 이범진 poemgene@naver.com

 
 
신앙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특히 정치적 쟁점에 반응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진보와 보수라는 말로는 다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기독교적’ 입장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심지어는 연인들도 서로의 신앙이 달라서 헤어진다. 타종교인과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같은 기독교인면서도 그 ‘색채’가 달라서 많이 헤어진다고 하니 이는 그만큼 이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다른’ 사상과 행동을 보여 줬던 윤치호와 김교신의 경우도 이 맥락 안에 있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보편적 종교와 특수한 민족적 상황의 맞물림을 고민하던 이들의 행보는 과연 얼마나 달랐을까. <윤치호와 김교신>(한울아카데미)이 그 요인을 추적한다.


힘이 곧 정의다


저자는 제국주의적인 허위의식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한 인물의 ‘대표’로 윤치호를 꼽는다. 윤치호는 이미 ‘친일파’로 잘 알려져 있다. 1941년 황국신민으로서 충성과 협력을 하겠다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일제의 징병에 힘썼다는 혐의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대일 협력의 길에 들어섰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그는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 운동을 이끌며, 만민공동회를 주관할 정도로 애국 인사였다. 무엇이 그를 ‘변절’로 이끌었을까. 민경배를 비롯한 몇몇 역사가들은 “그 당시 윤치호 정도의 인물 가운데 국내에서 반일의 기치를 들 수 있었던 인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역사의 큰 흐름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두둔하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학자인 저자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윤치호의 인식 구조 안에서 적극적으로 변절의 요인을 밝혀냈다. 이에 따르면 윤치호는 이미 유학 시절 제국주의의 사회진화론을 흡수해 ‘산업문명국=선=영원의 지복’이라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을 ‘그리스도교적 제국주의’ 형태로 이해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보면 윤치호 그 자신은 당연히 ‘비산업문명국=악=영원의 멸망’에 해당되는 조선인으로서 열등감에 사로잡혔을 터, 결과적으로 그가 지녔던 민족적 정체성이 파괴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식민지가 지속되면서 ‘강자=정복=약탈, 약자=복종=피약탈’이라는 도식으로 변했고, 강자의 불의가 당연시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왜 자꾸 쓸데없이 일본을 정치적으로 자극하나? 일본이 조선인들을 자극하는 언사와 정책, 선전을 계속한다면, 절대로 조선인들의 호감을 얻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조선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일본인들을 적대시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우리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속담을 기억해야 하고, 물 수 있을 때까지는 짖지도 말라는 냉철한 교훈을 유념해야 한다”(1920년 8월 10일).


저자는 이 날의 일기를 “노예의 처지에 있는 인간에게 비판 정신같이 무용하고 유해한 것은 없다는 해석 논리”가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던 윤치호의 눈에 ‘약자’인 조선인들의 저항은 쓸데없는 전투로 비쳤다는 분석이다.


보는 이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도 하는 이 시기의 애매모호한 일기들과는 달리, 1930년대 후반으로 가면 그의 ‘강자’ 세계관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논리적으로 약자의 민족일 수밖에 없었던 윤치호는, 조선이 일본과 ‘내선일체’를 이룸으로써 강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나이 79세, 1943년 5월 16일 일기는 다음과 같다.


“지난 11일 도쿄 내각은 조선인 지원병들에게 제국 해군의 병사가 되는 걸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인들에겐 기념비적인 법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조선 청년들이 영예로운 일본 해군에 입대할 수 있도록 인정해 준 제국 정부에 감사해야 한다. 아무쪼록 조선의 해군 병사들이 일본 해군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게 잘했으면 좋겠다.”


강자의 행위에 윤리적 잣대가 제거되자, 강함만이 최고의 가치라는 사고방식은 결국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약함이 곧 기독교인의 자랑


같은 해, 김교신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을 만나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식민지 조선은 신사 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받는 등 핍박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의 시대에도 김교신은 부활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심한 동결은 고통과 절망을 심각하게 하지만 다시 춘양(春陽)의 기쁨을 절대하게 한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부활에 있고 부활은 봄과 같이 임한다”며 종국에는 승리할 것임을 강조했다. 같은 절망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윤치호와 달리 김교신이 확신을 갖고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교신이 이해한 기독교에 그 해답이 있다. ‘힘’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근대성을 기독교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고 ‘신의 종’이 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자랑할 만한 게 하나도 없음을 진정으로 느껴야 진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강자가 추앙받는 시대에 반대로 약함을 내세워 약육강식의 질서를 뒤집어 보고자 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미꾸라지처럼 유영술을 부려 상층으로 상층으로만 사교를 넓히고 지위를 높이며 세력을 펼칠 때에 예수만은 낮은 하수도로 하수도로만 향했다. 거기서 병상(病傷)한 자와 패퇴한 자의 한숨을 들어주시고 눈물을 씻어 주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아 비천과 치욕의 극에까지 내려 가셨다.”


김교신이 그린 기독교의 참된 모습은 이러한 예수의 삶을 본받아, 상향성으로 향하는 힘의 가치관을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무교회주의를 계승했는데, 이때 그는 인간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신 절대중심주의’에 근거해 살아가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즉 그에게 있어 교회는 제도와 건물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증언되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를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함으로써, 조선의 상황에 맞는 ‘조선산 기독교’를 창조해 내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기독교와 민족 정체성을 함께 이어서 봄으로써, 마침내 핍박 가운데서도 일본 당국을 비판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인을 개구리로, 일본의 지배 정책을 겨울로 비유(에 불과)한 글을 트집 잡아, 1년간 옥에 가둘 정도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모든 정치적 언어가 금지된 때였다. 출옥 후 1944년 그는 돌연 흥남의 일본질소비료공장 노동자주택 관리계 직원으로 입사했다. 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인격적 각성을 돕기 위해서였다. 민중과는 거리를 두고 지식인 중심의 활동을 해 왔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어쨌든 약자의 하나님을 믿던 그에겐 자연스러운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교신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노동자들을 돌보던 중 자신도 감염되어 1945년 4월 24일,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교신은 암울한 식민지 조선에 창조적인 ‘재생’을 대표하는 전형이었다.


윤치호와 김교신의 접점


윤치호와 김교신 사이는 이렇게 멀기만 한 것일까.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윤치호 일기’ 속에 나오는, 김교신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언급은 사뭇 흥미롭다. ‘힘이 곧 정의’라고 믿었던 윤치호는 우치무라에게서 무언가를 읽어 내고 있었다.


(A)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소박한 태도, 그리고 그것을 용감하게 밝히는 태도를 존경한다. 난 그가 동아시아의 기독교인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1919년 2월 22일).


(B) “우치무라 씨의 일기를 읽었다. 사십 년이라는 오랫동안, 오직 하나의 길을 한눈도 팔지 않고, 근대 일본이 걸어 온 역동의 시대 한복판을 시종일관 기독교인으로서 살아온 그가 부럽기 짝이 없다. 그의 신앙은 마치 태풍과 같은 신학과 철학의 갈등 속을 싸워 이김으로써 차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의 신앙은 순화되고, 강화되고, 그리고 승리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우치무라 씨는 일본 기독교회에 있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본보기다”(1919년 4월 21일).


윤치호는 비슷한 연배의 우치무라 간조를 존경했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 시기 우치무라의 일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A)와 (B) 일기 사이에는 ‘전민족적’ 사건인 3·1운동이 있었다. 이 시기, 우치무라의 글 속에서 ‘정의가 정의다’라는 가치와 대화하던 윤치호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힘이 정의다’라는 가치관을 더 정교하게 다지게 된다.


3·1운동이 있고 3개월 정도 지난 때였다. 오전 11시쯤 종각 광장에서 7~8명의 사나이들이 현수막을 흔들면서 “만세”를 외쳤다. 경찰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 중 한 명이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자신의 목을 베었다. 이를 지켜 본 윤치호는 “더 이상 시위운동을 되풀이하는 것이 괜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 때문에는 서슴지 않고 바로 지옥이나 진배없는 곳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이 사람들의 용기에 그저 모자를 벗고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그는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힘세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또 옳다고 해서 반드시 강한 것도 아니다. 다만, 정의는 힘이 뒷받침을 받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있다”(1919년 6월 1일).


‘정의로운’ 그들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적극적인 대일 협력자라는 평가를 받던 193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31년 말 만주 사변 때 재만 동포들이 조난을 당하자 위문금과 의료반을 세 차례나 보낸 일, 나병환자 구제회를 조직해 기관 결성을 성립시킨 일, 수해와 재난마다 구제와 의료반을 보냈던 일 등 ‘친일파’라는 낙인 속에 가려져 있던 그의 삶 이면에는 의외의 장면들이 많이 노출된다. 그는 병원, 교회 건축, 구제 사업, 재난 위로, 해외 유학생들의 학비 등 1년 수입의 절반 이상을 사회사업에 썼다(윤치호가 친일한 부분에 대해서는 세차게 비판해야 하지만, 자기 성찰을 민족 ‘비하’라고 인식한다든지 자기를 ‘개조’하여 실력을 기르고자 한 것만으로 반민족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윤치호의 이러한 행보는 김교신과 만나는 유일한 지점이다. 김교신 역시 출옥 후에는 당시 일본이 운영하던 최첨단 공장에 계장으로 입사해 경제적 ‘기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노동자들의 생활 개선과 인격적인 각성을 돕는다는 게 목적이자 명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한글을 가르치고, 유치원과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김교신과 윤치호를 굳이 이분법적 구도로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태껏 ‘우리끼리’ 갈등의 역사를 살아왔는데 굳이 그 갈등 속으로 다시 들어가 갈등의 역사를 재현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시종일관 상반되는 상징으로 읽히는 <윤치호와 김교신>이지만, 그들의 갈등과 다름 사이에서는 ‘공통성과 유사성’도 열려 있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에도 분명 대화의 접점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랑하는 연인들도 신앙의 ‘색채’가 다르다는 이유로 헤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범진  꿈꾸는터 편집팀 poemgene@naver.com

이범진 님은 친구들과 함께 도서출판 꿈꾸는터를 꾸려 나가고 있다. 숭실대 기독교학과(M.A)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뉴스파워>와 <아름다운동행>에 한국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기사와 글을 쓰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1  ... 75 76 77 78 79 80 81 82 83  ... 287 
BLOG main image
그네를 타보신적 있으신가요? 땅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그곳, 바람을 맞으며 활짝 웃던 그날의 기분을 떠올려 봅니다. 젊은 꿈터의 블로그입니다. 그네를 타듯이 땅과 하늘의 경계를 허물고, 일과 놀이 사이를 넘나드는 젊은 꿈터의 혁명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by 젊은꿈터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287)
꿈꾸는터 | Book & People (61)
꿈 굽는 사람들 (24)
즐거운 틈새 (7)
즐거운 인생 (5)
언론보도 그 뒷면 (5)
출판사도 읽는 책 (21)
20대 즐거운 출판사 운영하기 (13)
좌충우돌 북 메이킹 (10)
좌충우돌 출판사 창업 (4)
백사장 분발 (7)
편집장 취재육감 (56)
디자이너 윤씨 (17)
허이삭의 연재만화 (25)
꿈터 스터디 (8)
젊은 일기 (9)
김회권의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 (10)
이젠 이-북(e-book) (5)

달력

«   2012/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예수님과 함께 드라마를?★
드라마틱
백소영 저




★일상의 샘물에서 퍼올리다★
야이로, 원숭이를 만나다
구미정 저



★ 국내최초 자기계발 소설 ★
리얼 멘토링
김한훈 저/송진우 저/김정태 저



:::: 대안경제 희망 대백과 ::::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전병길,고영 공저



:::: 사도신경 쉬운 해설서 ::::
40초의 고백
지관해 저



개(開)독교를 위한 변명(품절)
개독교를 위한 변명
변방의 청년 6인 저



★국제대학원 일급 메뉴얼★
한국에서 세계를 품다
김주헌 등저



김용담 대법관 퇴임기념 회고록
김용담 대법관의 판결 마지막 이야기
김용담 저



:: 변방의 학술도서 프로젝트 ::
신사참배와 맞섬의 신앙
이정호 저
tistory!get rss Tistory Tistory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