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김회권 교수님이 배덕만 교수님의 책을 추천한 터라, 책도 읽어보 인터뷰를 계획하고 있는터에 백현모 대표로부터 문자가 왔다. '이번 주 배덕만 교수님 인터뷰 어때?' <무한도전> 텔레파시 특집을 보고난 직후라, 뭔가 통했나 하는 기분에 느낌이 좋았다. 무려 3시간 동안 계속된 인터뷰...많은 이야기들을 담았다. 사진은 윤동혁 디자인팀장님이 직접 나서서 찍어주셨다.
|
| |||||||
| 배덕만 주사랑교회 목사는 신학대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교수였다. 물론 지금도 교수이지만, 3년 전 대전에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는 ‘목사’라는 호칭이 더 마음에 든다.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와 한국교회의 역사를 활발히 연구해온 그가, 홀연 지방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나섰던 이유가 무엇일가? 지난 10월 29일 금요일, 서울역 안 카페에서 그를 만나 목회 이야기, 근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근본주의 극복할 대안, 직접 찾아 나서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고, 역사적으로도 명확하게 정의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배 목사는 근본주의의 특성을 통해 이해를 돕는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지닌 근본주의는 과도한 배타성, 기복, 성장, 대형, 일등이라는 가치를 좇는 데서 발견된다. 최근 여론을 달구었던 ‘봉은사 땅 밟기’ 사건도 기독교 근본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어쨌든 이런 복잡한 역사를 공부하던 사람이 3년 전 지방으로 내려가 목회를 결심했다. 몸소 그 대안을 찾아내겠다는 굳은 의지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돈이나 사람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심히 한 영혼 한 영혼 섬기면 부흥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라는 것을, 아니 교회가 잘 돌아갈 거라는 것을 제가 대안으로 보여줄 수 있게 해주세요.’ 아무런 경험 없이 뛰어든 목회의 현장. 첫 교인은 식구들이었다. 총 5명. 교회에는 아무도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교회의 입지 조건도 최악이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에다, 대전에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 교인들과의 소소한 일상들이 희망 목회를 시작했지만 막상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신학생들에게 ‘개척하라’고 가르쳐온 그였지만, 정작 본인은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실감했다. “학교에서 풀타임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까 전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그런데 지금 3년이 지났는데, 교인이 33명이 왔어요. 이 중에 제가 전도한 사람이 한명도 없어요. 또 나를 알아서 온 사람도 없어요. 나 때문에 온 사람 아무도 없어요. 진짜로 하나님이 한명 한명 보내 주신 거예요.”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렀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알고 보니 그 시간동안 교인들과 함께 지냈던 소소한 일상들이 바로 근본주의를 극복하는 첫 걸음이었다. 생존이 불투명한 개척교회가 경험한 평범한 이야기 속에, 한국교회 성도들 전체가 함께 읽어도 좋을 하나님의 은혜와 희망이 담겨 있었다. “저희 교회는 미자립교회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돈 때문에 걱정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헌금을 사람들이 거의 안 내요. 돈 낼 사람들이 없거든요. 제가 제일 많이 내요. 다행히 선후배들, 개인 후원자들이 후원금을 보내주시거든요. 이전 목사님이 월세를 4년 동안 한 번도 못 냈거든요. 그 정도로 어려운 가운데에서, 사람도 돈도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거죠.” 민주적인 교회 만들기 배 목사가 목회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민주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개신교 근본주의의 특징 중에 하나가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모습. 목자가 다 끌고 가고, 평신도는 끌려가는 그런 교회로는 희망이 없다고 봤다. “저는 우리 교회의 주인은 모두라고 생각해요. 우리 교회는 나도 한 표, 어린 아이들도 한 표라고 생각해요. 이런 의미에서 저희는 월례회를 해요. 한 달에 한 번씩 모든 것을 같이 결정하고 성찬식도 아이들이 다함께 참여해요. 개방성찬을 하죠. 저는 목회자로서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이 제 역할이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모두가 같이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모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전부다 권리와 책임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게 제일 중요한 원칙이었어요.”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은 절대 다수결에 의해서 간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신자들이 원하면 절대로 강요하지 않고 따른다. 최근에는 ‘교회를 옮기자’는 안건을 투표에 올렸다. 교회 이전은 배 목사 자신이 추진하던 것으로, 이와 관련해 집회도 많이 했기 때문에 문제없이 통과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6대 7. 올해 가지 말고 내년에 가자는 입장이 더 많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하면서 목사의 말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지 않는 민주적인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고 밝혔다. ![]() 한 달에 한권씩 책도 함께 읽는다. 처음에는 다들 힘들어 했다. 몇 명만 참여하던 이 모임은 더디지만 꾸준히 계속되었고, 지금은 교인의 90% 이상이 책을 읽고 있다. 얼마 전에는 본회퍼 목사의 전기를 읽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긴 분량의 책으로, 독서 호흡이 짧았던 분들도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 독서가 익숙하지 않았던 평범한 성도들이 지금은 ‘빼앗긴 대지의 꿈’과 같은 어려운 책들도 다 소화해 낸다. “큰 교회 다니면서 이런 거에 익숙하지 않았던 분들인데, 교회에서 경건서적, 사회 서적 등을 돌아가면서 읽으면서 참 많이 깨이고 성숙해지는 것 같아요. 저를 비롯한 교인들이 눈이 트이고 시야가 넓어지고 있어요.” 세상을 바꾸는 도전 이러한 교인들의 노력과 참여는 지역사회를 돕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1년에 두 차례 구제헌금을 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때 모인 30만원으로 쌀 110킬로그램을 사서 동사무소에 갖다 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사랑교회가 그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교회였다. “오히려 우리 교회가 제일 가난하더라고요. 아무리 어려워도 구제헌금으로 30만원은 낼 수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대전에 있는 2,800개 교회가 일 년에 30만원씩 헌금해서 그것으로 쌀을 사면 얼마나 많이 모이겠어요.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대전에서는 밥을 굶는 사람이 없어지는 거죠.” 배 목사는 최근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와 ‘세상을 바꾸는 도전’이라는 두 책을 거의 동시에 펴냈다. 앞의 책이 문제의 진단이었다면, 뒤의 책에는 교회개척 후 3년간의 목회경험을 적었다. 진단과 대안을 동시에 펴낸 샘이다.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대안을 모색했기에,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희망적이다.
※ 다음은 인터뷰 중 일부 - 교인은 얼마나 되세요? 지금, 재적이 33명인데요. 애들 10명 어른 20명 정도예요. 처음에 비하면 엄청나게 부흥했죠. 우리 식구로 시작을 했는데, 5명에서 시작했으니까 거의 6배 성장했네요.(웃음) - 교회 역사를 가르치는 신학자에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언제 제일 그런 걸 느끼세요? 아 내가 목사구나 하는 걸요. 설교할 때요. 그리고 새벽예배 드릴 때요. 제일 느낄 때는 새벽예배 드릴 때예요. 왜냐하면 전에는 공부를 하니깐 새벽에 2시 넘어서 자고, 이러니깐 4시에 못 일어나죠. 목산데... 그래서 저한테 굉장히 콤플렉스였어요. 목산데 새벽예배도 못 나간다라는 거에 대해서... 그런데 요즘에 개척하고서 새벽예배를 드리니깐. 새벽에 설교하고 기도하고 이러니깐 참 목사구나 하는 걸 많이 느껴요. 제일 중요한 것은 교회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거예요. 개척교회 하면서, 그 전에는 대형교회 청년부 파트타임 목사로 다녔지. 그러면서 내가 청년부 애들이 내 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솔직히 전 이 교회에 월급쟁이라고 생각하고 다녔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개척을 하니깐, 선배들이 말했던 ‘개척교회 하게 되면 한 영혼이 중요하다’ 이 말이 정말 뭔지 알게 됐어요. 주일에 예배를 드리러 오면, 이제 교회 와서 예배 시작 전에 기도를 하잖아요. 그 때 우리 교회가 지하1층에 있는데, 내 귀가 1층으로 올라가서 입구에 가있어요. 누구 오나 하고요. (웃음) 그 다음에, 한국교회가 실질적으로 이런 교회가 60%가 넘거든요. 여기에 있는 목사님들 성도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정말 피부로 생기게 되고, 그게 이제 결국 저한테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많이 달라지던가요? 제가 그동안 생각했던, 여러 가지 생각이나 가르침들이 그동안은 구름 위를 걸어다니고 있었어요. 가난한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오거든요. 이 사람들의 삶을... 제가 그동안 목회를 안했던 이유가요. 사실 전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요. 그게 힘들거든요. 전 저 하나 감당하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고 끌어안고 가는 게 저한테 정말 힘들어서 안했거든요. 그런데 개척교회는 정말 그런 사람들만 와요. 가스가 끊겨서 우리교회에서 부르스타로 밥을 해먹는 사람도 있고, 집 다 날리고 아파트도 다 날리고 집에 TV도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대형교회에서는 본적이 없는데, 개척하고서는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되고 얘기 듣게 되고, 그런데,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결국 기도할 수밖에 없죠. 또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역사도 하시고, 또 이 사람들이 문제가 해결 될 때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감동. 또 내가 왜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지. 그리고 저 사람들이 저에게 주는 것. 그러니까 저로 하여금 눈을 구름 위에서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데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죠. 내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깨지고, 또 한계를 보고, 또 그 분 앞에서 회복하고... 이러면서 때려치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어요. 사실 제가 이걸 굳이 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제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대형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3년 하면서 ‘아 진짜 내가 목사가 되어가고 있구나. 목사가 됐다가 아니라 되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전 아직 목사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목사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죠. - 참 많이 바뀐 거네요. 시야라든가 세계관의 전환이라고 해도 될까요? 많이 바뀐 거죠. 굉장히 바뀐 거죠. 제가 3년 전에 목회를 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 그것 때문이예요. 나한테 그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은 두 가지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제가 가르치는 학교가 조그만 교단에 속한 오순절 계열의 신학교예요. 그니깐 우리학교는 특히 나이 먹은 사람들이 많이 와요. 정식으로 시험 봐서 들어가기 힘든 분들이 우리 학교는 면접으로 뽑으니깐 물론 인가난 학교지만.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나이 먹고 소명을 받아서 오니깐, 보통 이 분들이 개척을 해요. 그래서 나는 이 분들에게 교회 개척하라고 해놓고 전 해본 적이 없잖아요. 아 이건 결격사유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군대도 안다녀온 사람이 육군사관학교 교관이 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군대 다녀오는 심정으로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제가 현대기독교아카데미를 가든, 학회를 가든. 제가 한국 교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거든요. 제가 이제 막 비판을 하면 플로어에서 질문이 뭐냐면,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건 목회를 안 해봐서 그렇다는 거예요. 한국 교회 목사들이 괜히 타락하고 돈 밝히고 그런 게 아니라, 개척교회 신자들도 없는 상황에서 그 상황에서 한국 교회 민주화니 평화운동이니 그런 게 가능하겠냐 이거죠. 제가 목회를 안 해봤기 때문에, 나이브한 소리 유토피아적인 소리를 한다 이말 하는 거죠. 그런면에서, 내가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말하는 것도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저런 말을 당당하게 하려면 일단 제가 목회를 잘하고 말고를 떠나서 일단 목회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죠. 세 번째는 제일 중요한 데요. 내가 교회 교인들에게 비판을 했는데요. 사람들이 또 말하는 것이 ‘그렇게 안하면, 목회가 안 된다’ 이렇게 얘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깐 사람들이 목회하러 나가면 여러 군데 워크숍 다니면서 여러 가지 테크닉을 배워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교회를 돌리잖아요. 그런데 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성령충만함이 중요하다 이 것만으로도 목회가 된다. 교과서는 이렇게 가르쳤는데, 현장에서는 전혀 이렇게 안 되고 있다는 얘기잖아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돈이나 사람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심히 한 영혼 한 영혼 섬기면 부흥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라는 걸, 아니 교회가 잘 돌아갈 거라는 걸 내가 대안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했죠. 그래야 절 보는 신학생들이 아 저렇게 하면 되는 구나 할 것 아니예요. 여러 프로그램 안 쫒아다녀도, 하나님 믿음으로 된다는 걸 볼 수 있을 거 아니예요. 뭐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죠. 한국 교회, 제자들, 신학생들이 보고 있다고...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해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날 도와줘야 한다고 ... 그런 기도를 제일 많이 해요. -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굉장히 불안전 하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꿈꾸던 만큼은 아니지만, 저는 우리 교회 아무도 안 올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지하에 있죠. 심지어 아무도 없죠. 게다가 전 대전사람이 아니예요. 학교 때문에 대전에 가서 10개월 지났을 때, 개척을 한 거거든요. 그니깐 사람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죠. 또 우리 학교는 조그마한 학교지.... 그래서 아무도 안 올거라는 생각이 들죠. 그리고 전도도 못하죠. 저는 학교 풀타임으로 있으니깐 나가서 전도지 돌릴 상황이 아닌거죠. 그런데 지금 3년이 지났는데, 30명이 온거예요. 이 중에 제가 전도한 사람이 한명도 없어요. 또 나를 알아서 온 사람도 없어요. 나 때문에 온 사람 아무도 없어요. 진짜로 하나님이 한명 한명 보내 주신 거예요. 3년동안 지내는데, 저희가 미자립교회인데요. 한번도 돈 때문에 걱정을 해본 적이 없어요. 헌금을 사람들이 거의 안내요. 하하 돈낼 사람들이 없거든요. 제가 제일 많이 내요. 다행히 선후배들, 개인 후원자들 이런 분들이 후원금을 보내주시거든요. 전에 목사님이 월세를 4년동안 한번도 못 냈거든요. 그정도로 어려운 가운데에서 사람도 돈도 하나님이 보내주시는거죠. 감사한거죠. ^^ 3년동안 예배 다 했고, 새벽예배 금요예배 다 했고. 우리 가운데에서 또 신학자도 나오고요. 참 이정도면 부흥했다고 생각해요. - 책에서 목회자로서의 ‘존재’의 기쁨을 누려야 한다는 말을 참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목회철학이나 교회 운영은 어떻게 되나요?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민주적인 교회를 세우는 건데요. 목회자의 권위를 내려놓는 그런 교회요. 목자가 다 끌고가고, 평신도는 끌려가는 그런 교회 말고요. 저는 우리 교회의 주인은 모두라고 생각해요. 우리 교회는 나도 한표, 애들도 한표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런 의미에서 저희는 월례회를 해요. 한달에 한번씩 모든 것을 같이 결정하고 성찬식도 아이들도 다 참여해요. 개방성찬을 하죠. 저는 목회자로서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이 제 역할이고 교회를 운영하고 그런 것은 모두가 같이 역할 분담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돈도 같이 내고, 헌신도 같이해야 하고 그런거죠. 모든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 전부다 권리와 책임이 같이 가야 한다 이게 제일 중요한 것이었어요. 이렇게 민주적으로 간다. 모든 것은 절대 다수결에 의해서 간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신자들이 원하면 절대로 강요하지 않고 따른다. 이런 거죠. 그 다음으로 꼭 하고 싶은데, 지금은 제대로 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뭐냐면요. 지역교회가 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 동네에 꼭 필요한 교회, 그 동네의 환경에 적합한 교회. 동네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 우리 교회가 동네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 이런건데요. 제가 제일 크게 꾼 꿈이 뭐였냐면요. 동사무소와 파출소와 우리 교회가 협력해서 밤 12시에도 여자들이 그냥 걸어다닐 수 있는 동네를 만들자. 이게 제가 꿈꾸는 중요한 일이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동네에서는 단 한명도 밥을 굶는 사람이 없게 만들자 이거예요.
- 그런데도 구제헌금을 마련해서, 지역사회를 돕고 있다구요. 제가 개척한지 첫 해에, 우리 교인들 10명이 안되었을 때부터, 저희가 일년에 두 번 구제헌금을 해요. 이렇게 구제헌금을 했을 때, 30만원이 나왔어요. 이걸로 쌀을 샀더니, 110킬로가 나오더라고요. 110킬로는 동네 동사무소에 갔다줬어요. 근데, 저희 동네가 대전에서 제일 잘 사는 교회더라고요. 오히려 우리 교회가 제일 가난하더라고요.(웃음) 어째든 무슨 생각을 했냐면요. 대전에 2800개 교회가 있어요. 우리 교회가 제일 가난한 교회중에 하나겠죠. 그럼에도 우리 교회가 일년에 두 번 30만원씩 드릴 수 있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게 110킬로가 모아지는 건데요. 근데 대전에 2800개 교회가 일년에 30만원씩만 헌금을 해서 쌀을 사면 모아지는 쌀이 얼마나 되겠어요. ^^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대전에서는 밥을 굶는 사람이 없어지는거죠. 이런 운동을 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저희 교회가 지역교회들과 연합을 해서 이런 운동을 벌이고 싶어요. - 교회 성장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을 갖고 계신가요? 우리 교회는 100명 이상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역자마다 역량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제가 주일에 모여서 우리 교인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한번 씩 중보기도를 해줄 수 있는 맥시멈, 그리고 교인들이 아파서 심방을 요청했을 때, 달려가서 케어할 수 있는 양의 맥시멈이 어른 50명 아이 50명이라고 생각해요. 가정으로 따지면 25가정이겠죠. 저는 이정도면 교회가 자립할 수 있다고 봐요. 적지만, 목사님께 분명 사례비를 줄 수 있을 거라고 보고요. 그 다음부터 100명이 넘게 되면 50명 단위로 짤라서 지교회가 아닌 자매교회, 네트워크, 같은 뜻을 공유하는 목사들이 모이는 거죠. 이 교회들에서 우리가 신자들을 키워서 신학교를 보내고, 신학생들을 또한 자기 돈으로 공부하지 않고 교회가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애는 정말 신학교를 보냈으면 좋겠다 하는 아이를 추천해서 m.div 장학금을 교회가 대고, 그 아이가 공부를 마치면 우리 교회가 성장한 만큼 성도를 짤라내서 이 친구를 통해서 감당하게 하는 거죠. 이렇게 작은 교회 운동을 했으면 해요. 만약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대규모의 일을 할 때에는 이런 교회들이 공동으로 협력해서 선교사도 보내고 하는 등으로 일을 하는 거죠. 25가정 정도의 교회. 근데 또 너무 적으면 목사님이 먹고 살기 힘드니깐. 우리 교회의 생각이예요. 우리 교회는 이렇게 꿈을 꾸죠. - 교수님 목회를 하시면서, 목사하기를 잘했다 뿌듯했던 적이 있다면요? 참 많은 걸 느꼈고, 뿌듯했던 적도 많은데요. 그 중에. 한 청년이 우연히 오게 됐어요. 우리 교회에, 그 친구가 대형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요. 그 교회에서 실망을 해서 교회를 찾고 있던 중이었죠. 그런데 이때 이 친구가 삶이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거든요. 유능한 친군데, 중국에 명문 대학에서 유학도 하고, 중간에 사업을 했는데, 이게 망한 거예요. 그러다보니깐, 학교 졸업도 못하고 빚더미에 앉고 신용불량자도 되고, 직업도 갖기 힘들고, 나이는 30대 중반이고 그런 상황이었죠. 사실은 이 친구가 어릴 때 꿈이 선교사였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에서 목회자들에게 많은 실망을 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신학교를 안가겠다 마음을 먹은 거죠. 목회자, 신학교에 대한 편견과 실망이 많았던 거죠. 그런 사연이 있는 친구였는데, 그 때 교회 상황이 신자가 거의 없었고 새벽예배는 사실 아내랑 둘이서 드리고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친구가 이후로 새벽예배에 같이 나오게 됐죠. 그러면서 굉장히 많은 시간을 거의 1년 동안을 그 친구와 새벽예배를 드리게 된거죠. 그러다 보니깐 새벽예배가 예배가 아니라 신학 토론회 시간이 된 거에요. 기도를 한 뒤에 이 친구가 가진 온갖 질문들을 쏟아 놓고, 저는 이제 그 친구 질문에 대해 낑낑 대면서 얘기하고 같이 기도하고 또 기도 끝나고 나면 국밥집으로 옮겨서 2시간동안 더 얘기하고 이렇게 이 친구랑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된 거죠. 그리고 난 다음에, 이 친구가 1년이 지난 다음에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학교 입학을 했는데요. 그러면서도 그 와중에 결혼도 하고 집에서 반대와 어려움이 많았는데 말이죠. 결국에는 이 친구가 다 겪어내고 또 무엇보다 목회자 신학교 하나님에 대한 편견 이런 것들이 많이 없어진 거였죠. 문제들도 상당부분 해결이 되고... 또 우리 교회 많은 신자들이 이 친구를 통해서 오게 되었죠.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이 이런데 쓰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부흥강사도 아니고 전문적인 목회자도 아니고, 그냥 고민이 많은 신학잔데 나 같은 사람이 목회현장에 가면 어디에 쓰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고민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를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필요한 일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 친구를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죠. 또 이 친구도 저를 통해서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가게 된 거죠. 이때 저는 굉장히 기뻤어요.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 친구도 자기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거죠. 대형교회 같았으면 이러지 못했겠죠. 또 제가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었으면 그러지 못했겠죠. - 교회 안에서 교인들과 의견이나 그런 것들이 잘 맞나요? 우리는 한 달에 한권씩 책을 읽어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교수님들을 초빙해서 특강을 듣고요. 교회에도 책상이에요. 이런 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에요. 평생 거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 대부분이고요. 우리 교회 와서 처음으로 책을 읽어본 사람이 되게 많아요.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어했죠. 처음에는 그래서 몇 명만 따라왔는데, 지금은 90%가 독서에 참여를 해요. 얼마 전에는 본회퍼 전기를 600페이지를 다 읽었어요. 이런 교육과 과정을 겪으면서, 신자들이 굉장히 민주적인 교회에 익숙해진 거예요. 이번에 우리가 교회를 이전하자라고 제가 목표를 세우고 기도를 했어요. 근데, 10월에 투표를 했는데, 가지 말자고 6:7로 결과가 나온 거예요. 내가 막 집회도 하고 그랬는데 말이죠. 올해 가지 말고 내년에 가자는 거죠.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하면서, 이게 원칙이니깐, 결국 안가기로 했어요. 민주적인 교회로 가고 있다는 것이 참 좋기는 한데, 답답할 때도 많이 있네요. 대형교회 다니면서 이런 거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하물며 사회의식이라던가 역사의식 같은 것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는데, 교회에서 책들을 경건서적, 사회 서적 등을 돌아가면서 읽으면서 그리고 교회의 민주적인 환경을 겪으면서 참 많이 깨고 성숙해지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는 장지글러의 <빼앗긴 대지의 꿈> 이런거요. 그런데 결국에는 다 소화해 내더라고요. 물론 천천히 하지만, 어려운 책인데 말이죠. 교회가 많이 눈이 뜨이고 시야가 넓어지고 그런 것 같아요. 감사한 일이죠. |
| "한국의 신학교, 교권주의에 종속됐다" | |||
| 배덕만 대전 주사랑교회 목사(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학 교수)는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와 한국교회의 역사를 활발히 연구해왔다. 그랬기에 최근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봉은사 땅 밟기’ 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날카롭다. 뿌리 깊은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이러한 근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왔기에, 효과적인 대안도 모색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교회가 근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반공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봤다. 지금처럼 기독교인들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미국과 중국에 의해 남한과 북한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악의 경우 미국과 중국의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10월 29일 금요일, 서울역 안 카페에서 그를 만나 목회 이야기, 근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독특한 목회 이야기를 1편, 한국의 근본주의와 그 대책은 2편으로 나누어 실었다) 봉은사 땅 밟기 사건은 보수 기독교인들의 가르침 때문, 앞으로 더 노골화 될 것 - 개신교 근본주의 연구하신 분으로써 봉은사 사건 어떻게 보는지요?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지요. 리차드 마우 말대로 너무 무례합니다. 아프가니스탄 문제도 그렇고,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보세요. 나는 그렇게 주님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유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강조하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예수의 보혈의 구속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이 지경이 되고 있는 게 보혈의 능력을 믿는 신자들이 많아서 인가요?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세상보다는 ‘교회’에 관심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탈출해서 자기들만 천국가려고 하는 것 같아요. 한편 진보주의자들은 교회문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람들이고, 대화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죠. 그러려면 구원의 보혈 이야기는 소통이 안 되는데, 산상수훈은 통하기 때문에 강조하게 됩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이 말같이 안 느껴지는 세상이라 망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 봉은사 땅 밟기 사건은 사실 새로운 사건은 아니죠. 비슷한 사건들은 계속 일어났었습니다.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만의 뿌리 깊은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 노골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땅 밟기라는 것은 그 청년들 잘못이 아니라, 대한민국 보수 기독교 사람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죠. 앞으로 더 노골화 될 것으로 봅니다. 무지와 편견 극복이 관건, 타종교에 대한 진지한 공부 필요 “신학교는 희망 없다, 평신도중심 아카데미 운동이 교회 살릴 것” - 근본주의 연구자로서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단기적인 대안은 불가능할 것 같고, 분명 장기적인 대안은 생각해보셨을 겁니다. 어떤 방안이 있을까요? 결국 왜 이런 일이 생기냐 하면, 무지와 편견 때문이에요. 궁극적으로 해결하려면 무지와 편견을 깨야 합니다. 대화해야 하죠. 만나야 합니다. 이런 말 하면 종교적 다원주의라고 말하는데, 어차피 내가 다른 종교 사람들과 칼부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선교적 차원에서라도 만나고 대화하고 알아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 앞에서 갖고 있는 진지함만큼, 그들도 법당안에서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거죠. 멱살을 잡더라도 일단 만나야 합니다. 보수 개신교를 빼놓고는 다른 종교와 다들 잘 만나고 있어요. 이 대화의 장소로 그들을 어떻게 끄집어 내느냐가 시급한 문제라고 봐요. 교단차원에서 가기는 어려울 수 있으니, 할 수만 있다면 젊은 목회자들 안에서 대화에 참여하는, 지역사회 안에서 종교인들과 공공의 이익을 위한 협력사업을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슬람과 불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하죠. 내가 15년 넘게 신학을 배우고, 학부에서 종교학을 전공했지만 잘 몰라요. 만남의 장에서 서로 알아가야 합니다. 서로 간에 특강의 형태로라도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강의를 들어볼 필요가 있죠. 제일 중요한 것은 싸우더라도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가장 시급하죠. 그리고 당연히 평신도들 간의 만남으로 이어져야 하구요. 목사님들이 신자들을 온실에서 키우려고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신도들이 타종교인들과 만나면 물든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다종교사회에서 자랐죠. 야생에서 자라서 기독교를 믿고 있는 겁니다. 타종교인들과의 만남을 교양수준에서 가르쳐도 아무런 문제가 안 생겨요. 지적인 수준에서의 학습이 필요합니다. 용기 있는 목사님들이 진행하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만나고 공부하는 방법이 오래 걸릴지 몰라도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 젊은 목회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언급하셨습니다. 요즘 젊은 신학생들, 목사님들 어떻습니까? 개척 교회 목사님들이 대형 교회 목사들을 욕하면서 배워가는 경향이 있어요. ‘나도 1000명 만들어야지’ 마음먹는 것이죠. 청년들도 80년대 이후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게 되면서, 의식이나 이념을 버렸지 않습니까? 그것이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봅니다. 여기에 보수신앙이 더해지면서 더 무지해졌습니다. 자기들 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이 안에서 신실하다 하는 아이들이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이런 순환을 깨기가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주류 교회가 정치권과도 연결이 되어 있고, 그래서 대형교회는 기득권의 입장을 따라 갈 수밖에 없죠. 점점 더 악순환이죠. - 그럼 역시 대안은 아카데미 운동인가요? 그렇습니다. 한국의 신학교는 희망이 없다고 봐요. 교권주의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죠. 한국의 신학교는 목회와도 완전 단절되었습니다. 물론 사회와도 단절되었구요. 강단 신학교 안에서 사회를 전혀 탐구하지 않거든요. 한국 사회에서 주도권을 잃어 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에요. 여전히 칼빈 500년전 이야기하고 있고, 길선주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까요. 바로 지금의 신학이 없어요. 담임 목사들은 김동호 목사님 말씀처럼 ‘모이자, 돈내자, 집짓자’는 데에만 관심이 있지요. 목사님들 설교가 현장과 유리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의 고민과 사회가 전혀 반영이 안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에 제3의 대안으로 나온 것이 아카데미 운동입니다. 특히 소수이지만 문제의식을 느낀 청년들이 스스로 모였다는 것이 희망적이에요. 점점 더 늘어나고 있거든요. 여기에 교회의 30대, 40대 집사님들도 모이고 있어요. 제가 느헤미야 성경연구원을 하고 있는데, 의식 있는 집사님들도 많이 모이고 있습니다. 평신도들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이분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지금은 교회에서는 튀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가 갈 때까지 갔기 때문에 그런 분들에 의해서 판이 뒤집어 질 때가 됐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다가, 지금은 점점 공감을 받기 시작한 것이죠. 점점 이런 경향은 늘어날 것이고, 그런 시간이 빨리 올 것입니다. 그들이 예전에 접하지 못했던 아카데미에 참여하면서, 10년 안에 더 대중화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 숫자가 아니죠. 굶을 각오한 사람 몇 명만 있으면 됩니다. 예전에 지눌 스님이 100일 금식하니까 국무총리가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점점 이런 청년들이 많아진다는 게 희망적입니다. “오바마 당선 이후로, 미국 기독교 건강해지고 있어” -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는 요즘 어떻습니까? 3년 전에 <미국 기독교 우파의 정치참여>를 냈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전체적으로 지금도 큰 변화는 없다고봐요. 계량화할 수는 없지만, 지난 번 오바마 선거가 미국 정치판뿐만 아니라 기독교 판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 긍정적 역풍이 될 거라고 보고 있구요. 기독교 우파로 상징되는 근본주의가 부시 대통령 때 정점을 찍었다고 봅니다. 예전의 신학적, 윤리적 근본주의자들은 순수함과 진지함은 있었죠. 그러나 그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것마저도 잃어 버렸습니다. 정권에 맛을 보게 되면서 가치가 전도된 것이죠.
단물을 보게 되면,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정권 유지가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신앙을 팔아 넘긴 것이죠. 정권을 창출해야 하니까 순수성이고 뭐고 필요없이 가톨릭이나 유대교도 다 끌어안는 겁니다. 점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나중에 부시가 계속 거짓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올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들이 선거에서 처음 밀었던 사람이 뉴욕시장이었던 쥴리아니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4번 이혼한 사람이었어요. 두 번째로 밀었던 사람은 추적해보니 몰몬교였죠. 그래서 결국 남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재껴 놨던 존 매케인이었어요. 그런데 반대쪽에 나왔던 후보들은 남편이 바람 펴도 가정을 지킨 사람, 아내가 병들었는데 간호하면서 지킨 사람이었죠. 오히려 민주당 후보가 더 근본주의자들의 기준에 적합했던 겁니다. 이러면서 미국 기독교 우파 사람들의 맹신이 깨어지기 시작했어요. 이때 바로 오른쪽에 있던 청년들이 오바마 쪽으로 가면서, 내적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위축이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씩 왼쪽으로 오는 결과가 나타난 거죠. - 미국 교회의 움직임 중 특별히 집중하고 있는 동향이 있다면요? 이머징 처치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 주축이 60년대 이후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의 2세들로 이뤄졌습니다. 물론 그들은 타문화에서 자랐던 사람들이죠. 그들이 이방인으로 살다가 교회 안에서 들어오니, 너무 세속화되어 있다고 느꼈어요. 세상에서 누리는 것들을 교회에서 다 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들은 보다 본질적인 신앙을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열린 예배이니 뭐니 세상과 타협점을 찾은 예배에서 벗어나, 진짜 구도자적 신앙을 추구하려고 하는 거죠. 목적은 신앙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 그룹이 미국에서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어요. 다문화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타종교와도 대화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이들입니다. 이러한 흐름이 보수 기독교 안에서 전향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반대급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중요한 흐름이 될 것입니다. 오바마 당선을 기점으로 해서 미국 기독교가 건강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와 한국 교회의 연관성이 없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봉은사 땅 밟기를 봐도 그렇고, 이명박 후보가 장로라는 이름 때문에 대통령으로 찍은 걸 보면 한국 기독교도 갈 때 까지 갔습니다. 도덕적 양심을 다 팔아 넘기면서까지 말이죠. 이미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는 정점을 찍었다고 봅니다. 안티 기독교의 양산도 이때부터 가속화 되지 않았나 싶고요. 이명박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한국 기독교가 엄청나게 몰락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에 맞서 기독교 안에서 아카데미 운동하는 사람들이 다 386세대이다. 80년대에 보수교회에 다니면서, 6.10항쟁 보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갈등했던 이들이죠.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40대가 되면서 자기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꾹 참고 있던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거죠. 이것이 우리 아버지 세대와는 전혀 다른 복음주의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밥 먹고 살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죠. 주류가 몰락할 때, 한국 교회 안에 새살을 준비시켜 가고 계신 것 같아요. 이 패러다임의 변화는 인터넷을 통해서 더 확산될 것이라고 봐요.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 극복 못하면 미국과 중국 다툼 사이에서 재앙 맞을 것 “통일보다 평화 정착운동이 먼저” - 근본주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반공입니다. 반공적 기독교가 대북지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역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희망적으로 봐도 되는 건가요? 예전에 미국에서 누군가 기독교 우파와 관련된 글을 쓰면서 ‘신학적 정신분열’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어요. 앞뒤가 안 맞는 거죠. 대북지원도 북한 사람들이 불쌍해서 보낸 돈이 아니라고 봐요. 이 분야에 대해서 많이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보수교회의 기본적 전제들을 볼 때, 이 사람들이 정말 선한 양심과 고백에 근거해서 북한을 돕자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대북지원 할 때는 왜 그렇게 반대했습니까? 그게 인도적 지원은 아니라는 증거죠. 그분들이 지금 북한에서 교회 세울 구역을 다 정해놓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이만큼 했다하는 헤게모니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고, 북한 정권을 흔들기 위한 또 하나의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북한이 문제가 많고 취약한 국가라는 것을 계속 선전하는 것이죠. 겉으로 볼 때는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동정 같아 보이지만, 정치 공세인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있는 약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열심이지 않다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가 반공사상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통일이 되어도 재앙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엔 또 다시 대안 모색이 관건입니다만.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모두가 걱정하는 것은 흡수 통일이죠. 북한체제가 완전히 무너지고 전부 다 밑으로 내려오는 시나리오입니다. 경제적 격차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죠. 이북 출신들이 2등 시민이 되어 할램가를 형성하는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지금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속에서 한반도의 안녕입니다. 한반도의 운명은 이 두 나라에 달렸어요. 두 나라가 30년 안에 전쟁을 하던 안 하던 크게 한번 붙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북한 문제가 중국에 어떻게 넘어갈지가 걱정됩니다. 통일을 먼저 말하기 전에 한반도가 초토화 될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미국과 중국은 붙게 되어 있습니다. 석유문제, 달러문제, EU와의 문제 때문에 미국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EU를 눌러야 하는데, 미국이 예전보다 노쇠했기 때문에 전쟁이 날 가능성도 있어요. 이때 한반도는 불바다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나 쑥대밭을 만들어 놨던 것처럼요. 그래서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최고 외교 역량은 전 세계에 한반도를 평화 지역으로 만드는 데 집중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북한은 중국으로 넘어가고, 남한은 다시 50년 전으로 돌아가 지금의 멕시코처럼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 그러한 평화를 모색해야 할 기독교가 북한에 적대적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근본주의의 반공주의 극복이 관건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평화운동은 기독교인이 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이들이 북한에 가장 적대적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제 할아버지는 북한사람이었고, 외할아버지가 경찰가족 출신으로 공산당에 총살당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학교에서건 가정에서건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지요. ‘김일성 보다 못한 놈’이 최고의 욕이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북한을 끝까지 용서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저는 용서했지요. 우리세대는 극복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반공이념이 신학도 신앙도 잠식했잖아요. 그러나 우리 세대는 용서할 수 있어요. 신앙 안에서 치유받고, 아버지 때 이어져 온 가계의 저주를 끊어야지요. 기독교인들이 반공주의가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이유가 있지만, 아들 세대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해요. 상처를 성령 안에서 치유하고, 북한을 용서하고, 평화 통일을 위한 기수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제가 구체적인 평화운동은 하고 있지는 않지만, 21세기 우리의 모든 신학은 종국에는 평화운동으로 모아져야 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대한민국의 평화를 기대하는 데가 없어요. 정치적으로 생각할 뿐이죠. 그래서 특히나 분단 최대 희생자들의 자녀들이 이 운동에 달려들어야 합니다. 김구 선생님 말씀대로 3.8선을 끌어안고 죽는 결심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 제목입니다. 21세기 전쟁 뇌관을 끄는 역할을 우리 기독교인이 해야 합니다. 제 소명이에요. - 듣고 보니 목사님 본인이 반공을 극복한 사례 그 자체네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난 계기를 잘 활용해 한국 교회에 적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은 겁이 많이 납니다. 나도 처음에는 처절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대학 때 식당에서 민중가요가 나오면 “빨갱이 노래 듣기 싫다”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어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도 선배들을 향해 “서울대생들은 전부다 빨갱이 인 것 같다”고 분노를 했죠. 그러다가 3학년 때 조금씩 고민하고 변하기 시작했죠. 황석영의 소설을 읽고,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23살 때부터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곤 복음주의자들로는 평화운동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잠시 떠났었어요, 다시 군대 가 있는 동안 집안이 풍지박산이 나면서. 그 와중에 신앙이 회복이 되었죠. 그후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복음주의에서도 사회를 변혁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이제 내가 할 일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리곤 국내에 들어왔는데, 이미 제가 하려고 했던 것들을 적지않은 기독교 단체에서 하고 있더라구요. 놀랐죠. 그런 분들과 연대해서 환경과 평화운동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이런 운동은 돈 남는 사람들이 고상하게 시작하는 운동이 아니에요. 생존이 걸려 있는 운동이죠.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
'꿈 굽는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터뷰 # 7] 만화그리는 조대현 목사님~ (0) | 2011/02/25 |
|---|---|
| [인터뷰 #6] 난민지원단체 피난처 이호택 대표 (0) | 2011/01/21 |
| [인터뷰 # 5] 직접 대안찾아 나선, 교회사학자 배덕만 교수 (1) | 2010/12/10 |
| 김보경양 슈스케2 because of u (1) | 2010/10/17 |
| [인터뷰 #4] 복음과 수업, 두마리 토끼 다 잡아라 (0) | 2010/10/08 |
| [인터뷰 # 3] 마음을 치료하는 전도왕, 이병욱 원장님 (0) | 2010/09/06 |
TAG 6.10항쟁,
근본주의,
기독교근본주의,
길선주,
김대중정부,
김일성,
노무현정부,
느헤미야,
다원주의,
대장간,
미국개신교우파,
배덕만,
본회퍼,
봉은사,
사마리아인,
산상수훈,
신학대,
아프가니스탄,
안카페,
오순절,
유대교,
육군사관학교,
이명박,
지눌스님,
청일전쟁,
태백산맥,
한국개신교근본주의










생각해보니, <신사참배와 맞섬의 신앙> 지으신 이정호 목사님의 교회도 '주사랑교회' 아니었나? ㅋ
2010/12/13 0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