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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악함을 솔직하게 드러낸 그의 일기장때문에…
윤치호에 푹 빠진 키노시타 타카오 씨


“한국에는 윤치호와 관련된 기적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친일파’라고 매도당할 것을 알고도 일기를 공개한 유가족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방대한 자료를 윤치호가 ‘친일파’임을 밝히는 데만 사용한 한국학계이죠.”


키노시타 타카오 ⓒ김승범

 
도쿄의 한 도립고등학교에서 40년간 영어를 가르쳤던 키노시타 타카오(65)씨는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윤치호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일상에 지친 그에게 윤치호가 남긴 일기 11권은 일종의 은신처였다. 잠들기 전에 한두 시간씩 일기를 읽고 자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은퇴 후, 윤치호에 대해 더 제대로 알고 싶어 한국에 왔다. 공부할 곳을 찾아다녔다.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할아버지를 흔쾌히 받아주는 학교는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찾은 곳이 숭실대 기독교학과였다. 윤치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기독교학’을 공부해야 했다. 다행히 지도교수인 박정신 교수는 <윤치호 일기>의 일부를 번역하기도 한 터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키노시타 씨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됐다. 정확히 4년 전의 일이다.

지도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날 일본인 할아버지가 와서는 공부가 하고 싶다고 했어요. 우리 학교는 기숙사가 없기에 다른 큰 학교의 교수님을 소개해줬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에서였는지 거절을 당해서 다시 돌아왔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죠.”

4년이 지난 지금, 키노시타 씨는 올 8월 박사 학위 취득을 앞두고 있다. 신민회에 대한 연구로,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바꿀 수도 있는 큰 성과를 냈다.(박스기사 참조) 그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자취방을 찾았다.

“여름이라 방에 벌레가 많습니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유창하다. 젊은 시절부터 한국어에 관심이 많아, 소설을 즐겨 읽었다. 윤치호와의 인연도 광화문 서점에서 시작됐다. 우연히 <윤치호 일기> 국역본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키노시타 타카오 ⓒ김승범

 

제일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이면 윤치호였나요? 그는 ‘친일파’ 아닌가요?
“윤치호를 공부하러 왔다고 하면 한국인들의 반응은 너무 분명했어요. 친일파에 대해서 왜 연구까지 하느냐는 거였죠. 한국에는 윤치호와 관련된 기적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친일파’라고 매도당할 것을 알면서도 일기를 공개한 유가족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방대한 자료를 윤치호가 ‘친일파’임을 밝히는 데만 사용한 한국학계이죠.”

<윤치호 일기>는 권당 약 300~350쪽 분량으로 총 11권이다. 당시의 시대상은 물론, 한 인간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식민지 조선의 시대상은 물론,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 신앙에 대한 고민이 발견된다. 한문, 한글, 영문으로 되어 있는 그의 일기는 현재 3권까지만 번역되어 있다. 자신만 아는 암호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일기 전체를 읽지 않고는 해석되지 않는 부분들도 많다. 윤치호 연구가 부진한 이유 중의 하나다. 일부 연구자들이 확인되지도 않은 그의 ‘자결설’을 사실인 것처럼 적어 유포한 게 아직도 널리 퍼져 있는 현실이다.

윤치호가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의 회복과 근대화를 꿈꾼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제시대 후반으로 가면서 ‘노골적인’ 친일을 보였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을 추앙했다는 평가도 있고요.
“윤치호는 당시 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했던 조선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 학자들이 윤치호를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나쁜 예로 언급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사실 당시 일본 측이 느끼는 존재감을 고려하면 그만한 인물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스케일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일제가 사회 참여적인 기독교 세력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꾸민 ‘105인 사건’에서도 결국 유일한 희생자는 윤치호 한 명뿐이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당시의 윤치호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가 무조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이 너무나 많기에 저는 한국에서 윤치호 전도사가 되려고 합니다.”

키노시타 타카오 ⓒ김승범



키노시타 씨가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것도 모두 윤치호 때문이다. 윤치호를 통해 접한 기독교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윤치호는 자신의 약함과 추악함을 일기에 그대로 적어나갔어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요. 부족함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나님 앞에 서요. 그런 진실한 모습이 다 일기에 쓰여 있어요. 기독교가 이처럼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것을 용서해주고, 받아들여 주는 종교라면, 누구나 믿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약하고 못된 자신을 다 털어놓는 그의 일기는 저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 직접 한국에 와서 본 기독교의 모습은 어땠나요?
“목사님들이 모두 말끔한 양복을 입고 다니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부르주아의 종교가 아닌가, 지식인들의 종교가 아닌가 생각했던 적도 있고요. 여기저기 많은 교회를 소개받아 다녀봤는데 아직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했네요.”

그는 이번 여름, 일본에 돌아가 <윤치호 일기> 일본어 완역본 출판 작업에 들어간다. 유명 출판사와의 계약을 앞두고 있다.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완역본이 나오게 됐다. 키노시타 타카오 씨의 20여 년 열정이 일궈낸 결과다. 한국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정체된 한글 완역본 출판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키노시타 씨는 자신이 윤치호를 접하고, 한국에 와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윤치호가 만났던 그 하나님이 인도한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아직 ‘기독교인’이 아니다. ‘믿음’을 결단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할 게 많다. 담배도 그중에 하나라는 그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헤어질 때 이렇게 인사한다.

“다음에 올 때는 내가 ‘기독교인’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쉽게 믿고, 쉽게 버리는 이 시대에, 그의 오랜 고민과 갈등을 응원한다.


※ 윤치호는 누구?
1865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97년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1989년 제2대 독립협회 회장이 되었다. <독립신문> 사장과 만민공동회 회장을 맡았다. 그러다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의 친일행위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친일파’로 낙인찍혔다.



 

 

국사 교과서 바꿀 충격적이고 치밀한 연구

<윤치호 일기>는 1883년 1월 1일에 시작해 1943년 10월 7일에 끝나는 60년의 긴 기록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1906년 7월 4일부터 1915년 12월 31일에 이르는 약 9년 반 동안에는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 기간의 정중앙에 바로 ‘105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연구함으로써 일기의 공백을 메우겠다는 게 키노시타 타카오 씨의 목적이었다.

논문 제목은 ‘105인 사건과 청년학우회 연구’. 지금까지의 신민회 연구가 회고록이나 당시의 경찰, 검찰의 자료를 기준으로 진행되었다면, 키노시타 씨는 여기에 복심법원 공판경위서나 일본 측 자료를 이용해 더욱 객관적인 신민회의 모습을 그려냈다. 결론적으로 신민회는 ‘105인 사건’을 날조하기 위해 쿠니토모 및 총독부가 ‘청년학우회’에 덧씌운 이름이었음을 밝혀낸다. 사회 참여적인 평신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족운동단체 청년학우회가 신민회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정설로 굳어 국사 교과서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1907년 조직된 거대한 항일 비밀 결사’라는 표현과 회원 수가 800여 명이었다는 등의 설명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된다. 신민회 연구의 권위자를 비롯해, 이 논문의 심사를 맡은 외부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키노시타 씨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학술대회와 책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해질 예정이다.

지도교수인 박정신 교수는 “한국인들도 하지 못한 일을, 일본인이 직접 찾아와 연구해주어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이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김권정 경희대 교수도 “충격적이면서도 치밀한 연구”라며 “연구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논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글·인터뷰 / 이범진 편집장
키노시타 타카오씨의 논문은 꿈꾸는터에서 곧 출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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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상반되는 상징으로 읽히는 <윤치호와 김교신>이지만, 그들의 갈등과 다름 사이에서는 ‘공통성과 유사성’도 열려 있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에도 분명 대화의 접점은 있을 것이다."



윤치호와 김교신, 그 접점을 찾아서
<윤치호와 김교신>, 양현혜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 256쪽, 1만 9000원
[234호] 2010년 03월 23일 (화) 15:04:25 이범진 poemgene@naver.com

 
 
신앙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특히 정치적 쟁점에 반응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진보와 보수라는 말로는 다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기독교적’ 입장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심지어는 연인들도 서로의 신앙이 달라서 헤어진다. 타종교인과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같은 기독교인면서도 그 ‘색채’가 달라서 많이 헤어진다고 하니 이는 그만큼 이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다른’ 사상과 행동을 보여 줬던 윤치호와 김교신의 경우도 이 맥락 안에 있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보편적 종교와 특수한 민족적 상황의 맞물림을 고민하던 이들의 행보는 과연 얼마나 달랐을까. <윤치호와 김교신>(한울아카데미)이 그 요인을 추적한다.


힘이 곧 정의다


저자는 제국주의적인 허위의식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한 인물의 ‘대표’로 윤치호를 꼽는다. 윤치호는 이미 ‘친일파’로 잘 알려져 있다. 1941년 황국신민으로서 충성과 협력을 하겠다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일제의 징병에 힘썼다는 혐의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대일 협력의 길에 들어섰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그는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 운동을 이끌며, 만민공동회를 주관할 정도로 애국 인사였다. 무엇이 그를 ‘변절’로 이끌었을까. 민경배를 비롯한 몇몇 역사가들은 “그 당시 윤치호 정도의 인물 가운데 국내에서 반일의 기치를 들 수 있었던 인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역사의 큰 흐름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두둔하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학자인 저자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윤치호의 인식 구조 안에서 적극적으로 변절의 요인을 밝혀냈다. 이에 따르면 윤치호는 이미 유학 시절 제국주의의 사회진화론을 흡수해 ‘산업문명국=선=영원의 지복’이라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을 ‘그리스도교적 제국주의’ 형태로 이해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보면 윤치호 그 자신은 당연히 ‘비산업문명국=악=영원의 멸망’에 해당되는 조선인으로서 열등감에 사로잡혔을 터, 결과적으로 그가 지녔던 민족적 정체성이 파괴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식민지가 지속되면서 ‘강자=정복=약탈, 약자=복종=피약탈’이라는 도식으로 변했고, 강자의 불의가 당연시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왜 자꾸 쓸데없이 일본을 정치적으로 자극하나? 일본이 조선인들을 자극하는 언사와 정책, 선전을 계속한다면, 절대로 조선인들의 호감을 얻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조선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일본인들을 적대시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우리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속담을 기억해야 하고, 물 수 있을 때까지는 짖지도 말라는 냉철한 교훈을 유념해야 한다”(1920년 8월 10일).


저자는 이 날의 일기를 “노예의 처지에 있는 인간에게 비판 정신같이 무용하고 유해한 것은 없다는 해석 논리”가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던 윤치호의 눈에 ‘약자’인 조선인들의 저항은 쓸데없는 전투로 비쳤다는 분석이다.


보는 이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도 하는 이 시기의 애매모호한 일기들과는 달리, 1930년대 후반으로 가면 그의 ‘강자’ 세계관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논리적으로 약자의 민족일 수밖에 없었던 윤치호는, 조선이 일본과 ‘내선일체’를 이룸으로써 강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나이 79세, 1943년 5월 16일 일기는 다음과 같다.


“지난 11일 도쿄 내각은 조선인 지원병들에게 제국 해군의 병사가 되는 걸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인들에겐 기념비적인 법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조선 청년들이 영예로운 일본 해군에 입대할 수 있도록 인정해 준 제국 정부에 감사해야 한다. 아무쪼록 조선의 해군 병사들이 일본 해군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게 잘했으면 좋겠다.”


강자의 행위에 윤리적 잣대가 제거되자, 강함만이 최고의 가치라는 사고방식은 결국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약함이 곧 기독교인의 자랑


같은 해, 김교신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을 만나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식민지 조선은 신사 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받는 등 핍박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의 시대에도 김교신은 부활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심한 동결은 고통과 절망을 심각하게 하지만 다시 춘양(春陽)의 기쁨을 절대하게 한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부활에 있고 부활은 봄과 같이 임한다”며 종국에는 승리할 것임을 강조했다. 같은 절망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윤치호와 달리 김교신이 확신을 갖고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교신이 이해한 기독교에 그 해답이 있다. ‘힘’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근대성을 기독교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고 ‘신의 종’이 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자랑할 만한 게 하나도 없음을 진정으로 느껴야 진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강자가 추앙받는 시대에 반대로 약함을 내세워 약육강식의 질서를 뒤집어 보고자 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미꾸라지처럼 유영술을 부려 상층으로 상층으로만 사교를 넓히고 지위를 높이며 세력을 펼칠 때에 예수만은 낮은 하수도로 하수도로만 향했다. 거기서 병상(病傷)한 자와 패퇴한 자의 한숨을 들어주시고 눈물을 씻어 주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아 비천과 치욕의 극에까지 내려 가셨다.”


김교신이 그린 기독교의 참된 모습은 이러한 예수의 삶을 본받아, 상향성으로 향하는 힘의 가치관을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무교회주의를 계승했는데, 이때 그는 인간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신 절대중심주의’에 근거해 살아가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즉 그에게 있어 교회는 제도와 건물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증언되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를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함으로써, 조선의 상황에 맞는 ‘조선산 기독교’를 창조해 내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기독교와 민족 정체성을 함께 이어서 봄으로써, 마침내 핍박 가운데서도 일본 당국을 비판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인을 개구리로, 일본의 지배 정책을 겨울로 비유(에 불과)한 글을 트집 잡아, 1년간 옥에 가둘 정도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모든 정치적 언어가 금지된 때였다. 출옥 후 1944년 그는 돌연 흥남의 일본질소비료공장 노동자주택 관리계 직원으로 입사했다. 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인격적 각성을 돕기 위해서였다. 민중과는 거리를 두고 지식인 중심의 활동을 해 왔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어쨌든 약자의 하나님을 믿던 그에겐 자연스러운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교신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노동자들을 돌보던 중 자신도 감염되어 1945년 4월 24일,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교신은 암울한 식민지 조선에 창조적인 ‘재생’을 대표하는 전형이었다.


윤치호와 김교신의 접점


윤치호와 김교신 사이는 이렇게 멀기만 한 것일까.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윤치호 일기’ 속에 나오는, 김교신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언급은 사뭇 흥미롭다. ‘힘이 곧 정의’라고 믿었던 윤치호는 우치무라에게서 무언가를 읽어 내고 있었다.


(A)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소박한 태도, 그리고 그것을 용감하게 밝히는 태도를 존경한다. 난 그가 동아시아의 기독교인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1919년 2월 22일).


(B) “우치무라 씨의 일기를 읽었다. 사십 년이라는 오랫동안, 오직 하나의 길을 한눈도 팔지 않고, 근대 일본이 걸어 온 역동의 시대 한복판을 시종일관 기독교인으로서 살아온 그가 부럽기 짝이 없다. 그의 신앙은 마치 태풍과 같은 신학과 철학의 갈등 속을 싸워 이김으로써 차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의 신앙은 순화되고, 강화되고, 그리고 승리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우치무라 씨는 일본 기독교회에 있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본보기다”(1919년 4월 21일).


윤치호는 비슷한 연배의 우치무라 간조를 존경했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 시기 우치무라의 일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A)와 (B) 일기 사이에는 ‘전민족적’ 사건인 3·1운동이 있었다. 이 시기, 우치무라의 글 속에서 ‘정의가 정의다’라는 가치와 대화하던 윤치호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힘이 정의다’라는 가치관을 더 정교하게 다지게 된다.


3·1운동이 있고 3개월 정도 지난 때였다. 오전 11시쯤 종각 광장에서 7~8명의 사나이들이 현수막을 흔들면서 “만세”를 외쳤다. 경찰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 중 한 명이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자신의 목을 베었다. 이를 지켜 본 윤치호는 “더 이상 시위운동을 되풀이하는 것이 괜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 때문에는 서슴지 않고 바로 지옥이나 진배없는 곳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이 사람들의 용기에 그저 모자를 벗고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그는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힘세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또 옳다고 해서 반드시 강한 것도 아니다. 다만, 정의는 힘이 뒷받침을 받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있다”(1919년 6월 1일).


‘정의로운’ 그들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적극적인 대일 협력자라는 평가를 받던 193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31년 말 만주 사변 때 재만 동포들이 조난을 당하자 위문금과 의료반을 세 차례나 보낸 일, 나병환자 구제회를 조직해 기관 결성을 성립시킨 일, 수해와 재난마다 구제와 의료반을 보냈던 일 등 ‘친일파’라는 낙인 속에 가려져 있던 그의 삶 이면에는 의외의 장면들이 많이 노출된다. 그는 병원, 교회 건축, 구제 사업, 재난 위로, 해외 유학생들의 학비 등 1년 수입의 절반 이상을 사회사업에 썼다(윤치호가 친일한 부분에 대해서는 세차게 비판해야 하지만, 자기 성찰을 민족 ‘비하’라고 인식한다든지 자기를 ‘개조’하여 실력을 기르고자 한 것만으로 반민족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윤치호의 이러한 행보는 김교신과 만나는 유일한 지점이다. 김교신 역시 출옥 후에는 당시 일본이 운영하던 최첨단 공장에 계장으로 입사해 경제적 ‘기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노동자들의 생활 개선과 인격적인 각성을 돕는다는 게 목적이자 명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한글을 가르치고, 유치원과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김교신과 윤치호를 굳이 이분법적 구도로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태껏 ‘우리끼리’ 갈등의 역사를 살아왔는데 굳이 그 갈등 속으로 다시 들어가 갈등의 역사를 재현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시종일관 상반되는 상징으로 읽히는 <윤치호와 김교신>이지만, 그들의 갈등과 다름 사이에서는 ‘공통성과 유사성’도 열려 있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에도 분명 대화의 접점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랑하는 연인들도 신앙의 ‘색채’가 다르다는 이유로 헤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범진  꿈꾸는터 편집팀 poemgene@naver.com

이범진 님은 친구들과 함께 도서출판 꿈꾸는터를 꾸려 나가고 있다. 숭실대 기독교학과(M.A)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뉴스파워>와 <아름다운동행>에 한국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기사와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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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파 드라마에서는 이례적으로, 아니 내가 생각하기론 거의 최초로 선교사가 이야기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바로 제중원 설립에 기여한 알랜. 제중원을 배경으로한 드라마에서 알랜이라는 선교사가 빠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향후 행적들때문에 몇몇 누리꾼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한 알랜을 미화했다는 것.

어떤이들은 '장로 정부'의 친미 성향 전파를 위한 개입이 있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실제로 알랜은 제국주의적 성향을 지닌 선교사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지만, 공식 직함은 의사였다.

민비 시혜사건 이후에는 고종옆에서 권총을 차고 그를 호위하기도 했을 정도로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의 미국 선교사들은 '복음'과 '미국'을 구분하지 못했다. 애국과 선교가 적당히 혼합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 관점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 정서인 생명, 사랑, 평화 따위를 초월하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을 향한 애국심이 친일/반일을 넘어선 복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미화했다'라는 주장이 맞는지는 좀 의문이다.

당시 교육받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하고, 차별받던 민중들에게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보편개념을 심어준 것은 개신교가 맞다. 100%는 아니더라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제중원도 그중에 하나였다. 돈이 있는 사람들, 양반들이나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조선후기의 그 막장 사회에 사람대접을 해주는 코쟁이들을 만났으니 그들이 구세주가 아니고 무언가? 조선으로 향하는 알랜을 영웅처럼 그렸다는 비판은 지극히 오늘의 관점에서 본 전지적 시점이다.

 

당시의 민중들. 지푸라기만한 도움을 필요로 했던 그 백성들에게는 서양 의술... 아니..자신들을 사람대접 해줄만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의 알랜은 분명 '영웅'처럼 등장한 게 맞았다. 그가 미국 제국주의자의 앞잡이 노릇을 하려고 왔는지 어쨌는지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그가 믿는다던 하나님밖에 모를 것이다. 그 진정성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돈없는 일반 백성들을 치료해주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리고 치료받은 백성들에게 그는 '영웅'이었다. 드라마도 철저하게 민중의 시점에서 전개되고 있지 않는가?

 

알랜이 미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 과거 선행의 진정성을 근본적으로 뒤엎지는 못한다. 누구에게 그럴 권리가 있나? 또한 당시 조선사회는 세도정치의 막장으로 썩을 때로 썩어서 자생적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일본, 미국아니라 그 어떤 천사의 나라가 와도 노략질당해야 할 상황이었다라고 말하는 게 솔직한 거라고 본다. 물론, 그랬다고 침략자들의 범죄가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모두 시대의 아들들이니 그때 그 당시의 사람들을 평가하는데 너무 단선적으로 보지 말자는 것이다.

 

알랜은 나쁜 짓좀 했다고 치고, 고종의 미국방문을 돕기 위해 알랜이 제중원을 비웠을 때, 홀로 제중원을 지킨 선교사 헤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혼자 많은 환자들을 보며, 밤을 지새웠다. 눈이오나 비가오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가야했다. 결국 그는 이질에 걸려 34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제국주의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정치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양반이나 권력가보다는 하층민들과 함께 있기를 더 원했던 선교사였다. (이런 선교사들 꽤 있다) 역사를 사랑해 마지않는 그들은 왜 이런것은 보지 않으려 하는지..

 

결론적으로, 제중원은 '선교사'를 빼놓고는 온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MB=기독교'라는 단순무식한 망령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계에, "선교사를 미화한다"느니 "친미전파드라마"라느니..그들의 애정어린 비판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나, 감정이입하지 말고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 지옥간다고 예수믿으라고 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동조해온 나였지만

이번 드라마 제중원을 보고 오버하는 이들에게는 '오버'라고 말하고 싶다.

 

공중파 드라마에 미국 선교사 등장, 쌩뚱맞은가?

밑에 글은 이러한 의문에서 적어본 글이다.

 

 


 

SBS <제중원>, 선교사 대거 등장

제중원은 병원이자 예배공동체, 일부 시청자들 "선교사 미화" 비판도
 
지난 5일 포털사이트 ‘다음(Daum)’ 검색어 순위에 알랜(Horace Newton Allen)선교사가 이름을 올렸다. 그가 통합검색어 2위에 랭크된 이유는 바로 이날 방영된 SBS월화드라마 <제중원>의 방송직후였기 때문. 이날 방송분에서 구한말 기독교가 전해질 때 의료선교에 앞장섰던 알랜이 등장했다.


▲     ©이범진
드라마에 선교사 ‘알랜’ 등장


4일 첫 방송된 이 드라마는 국내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인 제중원(광혜원)을 배경으로 백정출신의 의학생, 선교사의 통역을 담당하던 역관의 딸 여의사, 성균관 유생이 함께 동등하게 의술을 겨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분제가 붕괴되어 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제중원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겠다는 게 제작진의 기획의도다.

이에 2회 방송분에서 ‘호러스 알랜’이 배를 타고 조선으로 오는 모습이 방영되면서,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했다. 특히, 극중 주인공인 백정의 아들 소근개(박용우 분)가 총상을 입어 쓰러진 상황이라 그 기대감을 극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제중원 설립의 숨은 목적은 ‘선교’

알랜의 일기에 따르면 실제로 제중원에는 약 20명 정도의 한국인들이 일을 도왔다. 정부의 주사, 조수(학생), 서기, 식당직, 사환 등을 맡은 이들이었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오전에는 4~6시간 정도 수술을 했고, 오후에는 70명정도의 환자들을 진료했다. 당시 의사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던 알랜이었으나, 병원 설립의 숨은 목적은 개신교 선교였다.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으나, 이 병원 수위의 아들이 전도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독교 금교령 등으로 1888년 5월~9월까지 모든 종교적인 활동이 금지되고, 그 이후에도 선교가 불법이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중원의 일부 학생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합리적(?) 예배공동체 제중원 ‘교회’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편지』에 의하면, 일부 학생들이 선교 사역과 연관된 기독교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수 없다고 병원장(외부부대신)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이를 들은 병원장은 그러나 “자네들 스승 역시 선교사일세. 자네들이 조씨와 같이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이 학교를 떠나도 좋네”라고 답했다. 알랜과 정부에 의하여 설립된 국립병원 제중원은 병원이면서 동시에, ‘합법적’ 선교 현장이었던 것이다. 당시 기독교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국법을 어기는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중원의 틈새에서는 예배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 기독교와 초기 의료선교』의 저자인 신재의 의사는 “제중원은 병원일뿐만 아니라 신앙공동체인 교회로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알렌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제중원에서 치료하는 가운데 예배, 성찬식, 세례 의식을 하는 교회를 설립했다는 문장이 한국기독교 역사에 추가되어야 한다는 논증이다. 

같은 책의 공저자인 경희대 김권정 교수도 “1890년대 정치사회변동 과정에서 제중원은 병원으로써 뿐만 아니라 신앙공동체로서 서울지역 장로교회 개교회 설립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며 “기독교 복음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강조했다.


▲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헤론 선교사도 이 드라마에 등장한다. 그는 선교 방법론이나 제중원의 자금운용 등의 문제로 알랜과 갈등을 겪었다.
일부 시청자들 “선교사 미화했다” 비판

하층민들과 함께한 헤론 선교사도 등장 예정


그러나 드라마 ‘제중원’에 대한 논란이 적지않다. 1,2회가 방송된 후 시청자게시판의 유지현 씨는 알랜에 대해서 “지금가치 1조원정도 조선의 재산을 팔아먹은 인물을 가공해서 마치 위대한 의료 선교사로 날조”하려한다며 비판했다.
 
이후 알랜이 운산광산의 채굴권,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업체에 주선한 것과 주한 미국공사가 되어 전등과 전차선로 부설 등의 권리를 미국에 넘겨준 사례를 지적한 것. 또한 일부 사이트에서는 “알랜을 통해서 미국의 모습을 미화하려는 장로 정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도 올라오고 있다. 

알랜 선교사에 대해서는 한국 교계에서도 교회나 교단에 따라 그 평가가 엇갈리고 있어, 이번 드라마 방영으로 그에 대한 토론이 더 풍성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더 주목이 되는 부분은 알랜에 이어 제중원을 맡는 헤론(John W. Heron)선교사에 대해서도 다룬다는 것이다. 그는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이질에 걸려 단명한 탓에 그동안은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왕이나 양반들을 대상으로 기독교를 전하던 알랜과는 달리 헤론은 제국주의적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하층민들 사이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의 모습을 드라마 <제중원>이 비중있게 그려낼 예정이다.


주인공 소근개는 실존인물 ‘박서양’ 모델

아버지 박성춘은 백정출신 세례교인으로, 열렬한 사회운동가


한편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근개(황정)는 백정 출신에서 의사가 된 실존인물 박서양을 모델로 했다. 박서양의 아버지는 박성춘으로 백정출신의 세례교인이다.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박성춘을 제중원 4대 원장 에비슨(O.R.Avison)선교사와 무어(S.F.Moore)목사가 발견해 치료한 것이 인연이 됐다. 계급에 상관없이 병을 고쳐주는 모습에 감동한 박성춘은 바로 기독교인이 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무어 목사가 인도하던 곤당골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건을 두고 양반 교인들이 ‘백정의 입교’라며 항의하고 교회를 떠난 것이다. 그들이 만든 교회가 바로 홍문동교회다.

그러나 박성춘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백정 교인들을 계속 전도해 교회의 안정을 주도했다. 그는 또 만민공동회의 연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할 정도로 정치 사회적인 개혁운동에 열정적이었다. 교회를 떠났던 양반 교인들도 3년 만에 다시 곤당골교회로 돌아왔다. 

이에 대해 김권정 교수는 “백정들을 열렬히 전도하며 사회운동에도 열심인 박성춘을 보며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라며 “말씀에 기초해 봤을 때 자신들이 백정출신 교인들에게 했던 행동이 얼마나 비신앙적인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에게서 자라난 아들 박서양은 1908년 제중원을 졸업해 조선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일본의 국권침탈 이후에는 간도로 옮겨 병원과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한다. 드라마 <제중원>에서 ‘황정’으로 묘사되는 그는 혼란과 격동의 시대에 인술로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 세번째가 알랜 역을 맡은 션 리차드, 100대1의 경쟁률로 뽑혀진 주연급 역할이다. 공중파 드라마에서 선교사가 다뤄지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 드라마는 36부작으로 매주 월,화요일 9시55분에 SBS에서 방송된다.


 
개신교물 빼면 ‘제중원’ 설명 안 되는데…

이렇게 보아도, 저렇게 보아도 제중원은 개신교라는 종교를 빼고는 온전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공중파 드라마에서는 이례적으로 선교사가 비중있게 등장해 일부 시청자들이 뜬금없어 했지만, 사실상 ‘뜬금없음’이 아닌 것이다. 선교사들과의 얽힌 역사를 풀어내지 않으면 ‘제중원’ 자체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드라마 <제중원>을 보는 시청자들의 선교사에 대한 평가는 좋든, 나쁘든 한국 교계에는 득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부정적 평가에는 합당한 토론으로 맞서고 긍정적 평가에는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임으로, 한국기독교사를 더 풍성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개신교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근현대사 사건들은 이외에도 많이 있다(독립협회도 개신교 공동체를 빼고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계속 발굴하고 밝혀내야, 교과서를 쓰는 이들도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개신교를 끼워주지 않을까? 여러모로 이 드라마와 시청자들의 반응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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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사합니다.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2010/03/30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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