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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악함을 솔직하게 드러낸 그의 일기장때문에…
윤치호에 푹 빠진 키노시타 타카오 씨


“한국에는 윤치호와 관련된 기적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친일파’라고 매도당할 것을 알고도 일기를 공개한 유가족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방대한 자료를 윤치호가 ‘친일파’임을 밝히는 데만 사용한 한국학계이죠.”


키노시타 타카오 ⓒ김승범

 
도쿄의 한 도립고등학교에서 40년간 영어를 가르쳤던 키노시타 타카오(65)씨는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윤치호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일상에 지친 그에게 윤치호가 남긴 일기 11권은 일종의 은신처였다. 잠들기 전에 한두 시간씩 일기를 읽고 자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은퇴 후, 윤치호에 대해 더 제대로 알고 싶어 한국에 왔다. 공부할 곳을 찾아다녔다.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할아버지를 흔쾌히 받아주는 학교는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찾은 곳이 숭실대 기독교학과였다. 윤치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기독교학’을 공부해야 했다. 다행히 지도교수인 박정신 교수는 <윤치호 일기>의 일부를 번역하기도 한 터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키노시타 씨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됐다. 정확히 4년 전의 일이다.

지도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날 일본인 할아버지가 와서는 공부가 하고 싶다고 했어요. 우리 학교는 기숙사가 없기에 다른 큰 학교의 교수님을 소개해줬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에서였는지 거절을 당해서 다시 돌아왔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죠.”

4년이 지난 지금, 키노시타 씨는 올 8월 박사 학위 취득을 앞두고 있다. 신민회에 대한 연구로,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바꿀 수도 있는 큰 성과를 냈다.(박스기사 참조) 그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자취방을 찾았다.

“여름이라 방에 벌레가 많습니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유창하다. 젊은 시절부터 한국어에 관심이 많아, 소설을 즐겨 읽었다. 윤치호와의 인연도 광화문 서점에서 시작됐다. 우연히 <윤치호 일기> 국역본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키노시타 타카오 ⓒ김승범

 

제일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이면 윤치호였나요? 그는 ‘친일파’ 아닌가요?
“윤치호를 공부하러 왔다고 하면 한국인들의 반응은 너무 분명했어요. 친일파에 대해서 왜 연구까지 하느냐는 거였죠. 한국에는 윤치호와 관련된 기적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친일파’라고 매도당할 것을 알면서도 일기를 공개한 유가족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방대한 자료를 윤치호가 ‘친일파’임을 밝히는 데만 사용한 한국학계이죠.”

<윤치호 일기>는 권당 약 300~350쪽 분량으로 총 11권이다. 당시의 시대상은 물론, 한 인간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식민지 조선의 시대상은 물론,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 신앙에 대한 고민이 발견된다. 한문, 한글, 영문으로 되어 있는 그의 일기는 현재 3권까지만 번역되어 있다. 자신만 아는 암호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일기 전체를 읽지 않고는 해석되지 않는 부분들도 많다. 윤치호 연구가 부진한 이유 중의 하나다. 일부 연구자들이 확인되지도 않은 그의 ‘자결설’을 사실인 것처럼 적어 유포한 게 아직도 널리 퍼져 있는 현실이다.

윤치호가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의 회복과 근대화를 꿈꾼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제시대 후반으로 가면서 ‘노골적인’ 친일을 보였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을 추앙했다는 평가도 있고요.
“윤치호는 당시 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했던 조선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 학자들이 윤치호를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나쁜 예로 언급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사실 당시 일본 측이 느끼는 존재감을 고려하면 그만한 인물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스케일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일제가 사회 참여적인 기독교 세력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꾸민 ‘105인 사건’에서도 결국 유일한 희생자는 윤치호 한 명뿐이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당시의 윤치호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가 무조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이 너무나 많기에 저는 한국에서 윤치호 전도사가 되려고 합니다.”

키노시타 타카오 ⓒ김승범



키노시타 씨가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것도 모두 윤치호 때문이다. 윤치호를 통해 접한 기독교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윤치호는 자신의 약함과 추악함을 일기에 그대로 적어나갔어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요. 부족함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나님 앞에 서요. 그런 진실한 모습이 다 일기에 쓰여 있어요. 기독교가 이처럼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것을 용서해주고, 받아들여 주는 종교라면, 누구나 믿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약하고 못된 자신을 다 털어놓는 그의 일기는 저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 직접 한국에 와서 본 기독교의 모습은 어땠나요?
“목사님들이 모두 말끔한 양복을 입고 다니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부르주아의 종교가 아닌가, 지식인들의 종교가 아닌가 생각했던 적도 있고요. 여기저기 많은 교회를 소개받아 다녀봤는데 아직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했네요.”

그는 이번 여름, 일본에 돌아가 <윤치호 일기> 일본어 완역본 출판 작업에 들어간다. 유명 출판사와의 계약을 앞두고 있다.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완역본이 나오게 됐다. 키노시타 타카오 씨의 20여 년 열정이 일궈낸 결과다. 한국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정체된 한글 완역본 출판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키노시타 씨는 자신이 윤치호를 접하고, 한국에 와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윤치호가 만났던 그 하나님이 인도한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아직 ‘기독교인’이 아니다. ‘믿음’을 결단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할 게 많다. 담배도 그중에 하나라는 그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헤어질 때 이렇게 인사한다.

“다음에 올 때는 내가 ‘기독교인’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쉽게 믿고, 쉽게 버리는 이 시대에, 그의 오랜 고민과 갈등을 응원한다.


※ 윤치호는 누구?
1865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97년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1989년 제2대 독립협회 회장이 되었다. <독립신문> 사장과 만민공동회 회장을 맡았다. 그러다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의 친일행위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친일파’로 낙인찍혔다.



 

 

국사 교과서 바꿀 충격적이고 치밀한 연구

<윤치호 일기>는 1883년 1월 1일에 시작해 1943년 10월 7일에 끝나는 60년의 긴 기록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1906년 7월 4일부터 1915년 12월 31일에 이르는 약 9년 반 동안에는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 기간의 정중앙에 바로 ‘105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연구함으로써 일기의 공백을 메우겠다는 게 키노시타 타카오 씨의 목적이었다.

논문 제목은 ‘105인 사건과 청년학우회 연구’. 지금까지의 신민회 연구가 회고록이나 당시의 경찰, 검찰의 자료를 기준으로 진행되었다면, 키노시타 씨는 여기에 복심법원 공판경위서나 일본 측 자료를 이용해 더욱 객관적인 신민회의 모습을 그려냈다. 결론적으로 신민회는 ‘105인 사건’을 날조하기 위해 쿠니토모 및 총독부가 ‘청년학우회’에 덧씌운 이름이었음을 밝혀낸다. 사회 참여적인 평신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족운동단체 청년학우회가 신민회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정설로 굳어 국사 교과서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1907년 조직된 거대한 항일 비밀 결사’라는 표현과 회원 수가 800여 명이었다는 등의 설명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된다. 신민회 연구의 권위자를 비롯해, 이 논문의 심사를 맡은 외부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키노시타 씨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학술대회와 책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해질 예정이다.

지도교수인 박정신 교수는 “한국인들도 하지 못한 일을, 일본인이 직접 찾아와 연구해주어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이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김권정 경희대 교수도 “충격적이면서도 치밀한 연구”라며 “연구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논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글·인터뷰 / 이범진 편집장
키노시타 타카오씨의 논문은 꿈꾸는터에서 곧 출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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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상반되는 상징으로 읽히는 <윤치호와 김교신>이지만, 그들의 갈등과 다름 사이에서는 ‘공통성과 유사성’도 열려 있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에도 분명 대화의 접점은 있을 것이다."



윤치호와 김교신, 그 접점을 찾아서
<윤치호와 김교신>, 양현혜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 256쪽, 1만 9000원
[234호] 2010년 03월 23일 (화) 15:04:25 이범진 poemgene@naver.com

 
 
신앙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특히 정치적 쟁점에 반응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진보와 보수라는 말로는 다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기독교적’ 입장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심지어는 연인들도 서로의 신앙이 달라서 헤어진다. 타종교인과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같은 기독교인면서도 그 ‘색채’가 달라서 많이 헤어진다고 하니 이는 그만큼 이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다른’ 사상과 행동을 보여 줬던 윤치호와 김교신의 경우도 이 맥락 안에 있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보편적 종교와 특수한 민족적 상황의 맞물림을 고민하던 이들의 행보는 과연 얼마나 달랐을까. <윤치호와 김교신>(한울아카데미)이 그 요인을 추적한다.


힘이 곧 정의다


저자는 제국주의적인 허위의식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한 인물의 ‘대표’로 윤치호를 꼽는다. 윤치호는 이미 ‘친일파’로 잘 알려져 있다. 1941년 황국신민으로서 충성과 협력을 하겠다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일제의 징병에 힘썼다는 혐의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대일 협력의 길에 들어섰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그는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 운동을 이끌며, 만민공동회를 주관할 정도로 애국 인사였다. 무엇이 그를 ‘변절’로 이끌었을까. 민경배를 비롯한 몇몇 역사가들은 “그 당시 윤치호 정도의 인물 가운데 국내에서 반일의 기치를 들 수 있었던 인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역사의 큰 흐름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두둔하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학자인 저자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윤치호의 인식 구조 안에서 적극적으로 변절의 요인을 밝혀냈다. 이에 따르면 윤치호는 이미 유학 시절 제국주의의 사회진화론을 흡수해 ‘산업문명국=선=영원의 지복’이라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을 ‘그리스도교적 제국주의’ 형태로 이해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보면 윤치호 그 자신은 당연히 ‘비산업문명국=악=영원의 멸망’에 해당되는 조선인으로서 열등감에 사로잡혔을 터, 결과적으로 그가 지녔던 민족적 정체성이 파괴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식민지가 지속되면서 ‘강자=정복=약탈, 약자=복종=피약탈’이라는 도식으로 변했고, 강자의 불의가 당연시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왜 자꾸 쓸데없이 일본을 정치적으로 자극하나? 일본이 조선인들을 자극하는 언사와 정책, 선전을 계속한다면, 절대로 조선인들의 호감을 얻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조선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일본인들을 적대시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우리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속담을 기억해야 하고, 물 수 있을 때까지는 짖지도 말라는 냉철한 교훈을 유념해야 한다”(1920년 8월 10일).


저자는 이 날의 일기를 “노예의 처지에 있는 인간에게 비판 정신같이 무용하고 유해한 것은 없다는 해석 논리”가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던 윤치호의 눈에 ‘약자’인 조선인들의 저항은 쓸데없는 전투로 비쳤다는 분석이다.


보는 이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도 하는 이 시기의 애매모호한 일기들과는 달리, 1930년대 후반으로 가면 그의 ‘강자’ 세계관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논리적으로 약자의 민족일 수밖에 없었던 윤치호는, 조선이 일본과 ‘내선일체’를 이룸으로써 강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나이 79세, 1943년 5월 16일 일기는 다음과 같다.


“지난 11일 도쿄 내각은 조선인 지원병들에게 제국 해군의 병사가 되는 걸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인들에겐 기념비적인 법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조선 청년들이 영예로운 일본 해군에 입대할 수 있도록 인정해 준 제국 정부에 감사해야 한다. 아무쪼록 조선의 해군 병사들이 일본 해군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게 잘했으면 좋겠다.”


강자의 행위에 윤리적 잣대가 제거되자, 강함만이 최고의 가치라는 사고방식은 결국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약함이 곧 기독교인의 자랑


같은 해, 김교신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을 만나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식민지 조선은 신사 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받는 등 핍박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의 시대에도 김교신은 부활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심한 동결은 고통과 절망을 심각하게 하지만 다시 춘양(春陽)의 기쁨을 절대하게 한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부활에 있고 부활은 봄과 같이 임한다”며 종국에는 승리할 것임을 강조했다. 같은 절망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윤치호와 달리 김교신이 확신을 갖고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교신이 이해한 기독교에 그 해답이 있다. ‘힘’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근대성을 기독교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고 ‘신의 종’이 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자랑할 만한 게 하나도 없음을 진정으로 느껴야 진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강자가 추앙받는 시대에 반대로 약함을 내세워 약육강식의 질서를 뒤집어 보고자 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미꾸라지처럼 유영술을 부려 상층으로 상층으로만 사교를 넓히고 지위를 높이며 세력을 펼칠 때에 예수만은 낮은 하수도로 하수도로만 향했다. 거기서 병상(病傷)한 자와 패퇴한 자의 한숨을 들어주시고 눈물을 씻어 주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아 비천과 치욕의 극에까지 내려 가셨다.”


김교신이 그린 기독교의 참된 모습은 이러한 예수의 삶을 본받아, 상향성으로 향하는 힘의 가치관을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무교회주의를 계승했는데, 이때 그는 인간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신 절대중심주의’에 근거해 살아가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즉 그에게 있어 교회는 제도와 건물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증언되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를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함으로써, 조선의 상황에 맞는 ‘조선산 기독교’를 창조해 내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기독교와 민족 정체성을 함께 이어서 봄으로써, 마침내 핍박 가운데서도 일본 당국을 비판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인을 개구리로, 일본의 지배 정책을 겨울로 비유(에 불과)한 글을 트집 잡아, 1년간 옥에 가둘 정도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모든 정치적 언어가 금지된 때였다. 출옥 후 1944년 그는 돌연 흥남의 일본질소비료공장 노동자주택 관리계 직원으로 입사했다. 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인격적 각성을 돕기 위해서였다. 민중과는 거리를 두고 지식인 중심의 활동을 해 왔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어쨌든 약자의 하나님을 믿던 그에겐 자연스러운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교신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노동자들을 돌보던 중 자신도 감염되어 1945년 4월 24일,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교신은 암울한 식민지 조선에 창조적인 ‘재생’을 대표하는 전형이었다.


윤치호와 김교신의 접점


윤치호와 김교신 사이는 이렇게 멀기만 한 것일까.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윤치호 일기’ 속에 나오는, 김교신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언급은 사뭇 흥미롭다. ‘힘이 곧 정의’라고 믿었던 윤치호는 우치무라에게서 무언가를 읽어 내고 있었다.


(A)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소박한 태도, 그리고 그것을 용감하게 밝히는 태도를 존경한다. 난 그가 동아시아의 기독교인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1919년 2월 22일).


(B) “우치무라 씨의 일기를 읽었다. 사십 년이라는 오랫동안, 오직 하나의 길을 한눈도 팔지 않고, 근대 일본이 걸어 온 역동의 시대 한복판을 시종일관 기독교인으로서 살아온 그가 부럽기 짝이 없다. 그의 신앙은 마치 태풍과 같은 신학과 철학의 갈등 속을 싸워 이김으로써 차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의 신앙은 순화되고, 강화되고, 그리고 승리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우치무라 씨는 일본 기독교회에 있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본보기다”(1919년 4월 21일).


윤치호는 비슷한 연배의 우치무라 간조를 존경했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 시기 우치무라의 일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A)와 (B) 일기 사이에는 ‘전민족적’ 사건인 3·1운동이 있었다. 이 시기, 우치무라의 글 속에서 ‘정의가 정의다’라는 가치와 대화하던 윤치호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힘이 정의다’라는 가치관을 더 정교하게 다지게 된다.


3·1운동이 있고 3개월 정도 지난 때였다. 오전 11시쯤 종각 광장에서 7~8명의 사나이들이 현수막을 흔들면서 “만세”를 외쳤다. 경찰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 중 한 명이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자신의 목을 베었다. 이를 지켜 본 윤치호는 “더 이상 시위운동을 되풀이하는 것이 괜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 때문에는 서슴지 않고 바로 지옥이나 진배없는 곳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이 사람들의 용기에 그저 모자를 벗고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그는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힘세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또 옳다고 해서 반드시 강한 것도 아니다. 다만, 정의는 힘이 뒷받침을 받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있다”(1919년 6월 1일).


‘정의로운’ 그들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적극적인 대일 협력자라는 평가를 받던 193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31년 말 만주 사변 때 재만 동포들이 조난을 당하자 위문금과 의료반을 세 차례나 보낸 일, 나병환자 구제회를 조직해 기관 결성을 성립시킨 일, 수해와 재난마다 구제와 의료반을 보냈던 일 등 ‘친일파’라는 낙인 속에 가려져 있던 그의 삶 이면에는 의외의 장면들이 많이 노출된다. 그는 병원, 교회 건축, 구제 사업, 재난 위로, 해외 유학생들의 학비 등 1년 수입의 절반 이상을 사회사업에 썼다(윤치호가 친일한 부분에 대해서는 세차게 비판해야 하지만, 자기 성찰을 민족 ‘비하’라고 인식한다든지 자기를 ‘개조’하여 실력을 기르고자 한 것만으로 반민족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윤치호의 이러한 행보는 김교신과 만나는 유일한 지점이다. 김교신 역시 출옥 후에는 당시 일본이 운영하던 최첨단 공장에 계장으로 입사해 경제적 ‘기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노동자들의 생활 개선과 인격적인 각성을 돕는다는 게 목적이자 명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한글을 가르치고, 유치원과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김교신과 윤치호를 굳이 이분법적 구도로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태껏 ‘우리끼리’ 갈등의 역사를 살아왔는데 굳이 그 갈등 속으로 다시 들어가 갈등의 역사를 재현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시종일관 상반되는 상징으로 읽히는 <윤치호와 김교신>이지만, 그들의 갈등과 다름 사이에서는 ‘공통성과 유사성’도 열려 있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에도 분명 대화의 접점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랑하는 연인들도 신앙의 ‘색채’가 다르다는 이유로 헤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범진  꿈꾸는터 편집팀 poemgene@naver.com

이범진 님은 친구들과 함께 도서출판 꿈꾸는터를 꾸려 나가고 있다. 숭실대 기독교학과(M.A)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뉴스파워>와 <아름다운동행>에 한국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기사와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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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inihp.cyworld.com/20809953/41996465304
(제가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ㅋㅋ 링크를 클릭하시면, 그리는 과정이 동영상으로 뜹니다)

 

  

얼마전 이화여대 양현혜 교수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는 "윤치호는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의 사상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며

윤치호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서로다른 평가에 대해 부정했습니다.

 

한 사람의 고민많았던 지식인이, 후대의 '지식인'들에게

이렇게 조롱거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는 자극적인 문장들만을 뽑아내 윤치호를 매장시키려는 듯 보였습니다.

 

그는 윤치호 일기를 다 읽었노라고 자신하면서,

더 이상 연구할 가치와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인물을 연구하는 사가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매우 단선적으로 묘사하고 결론짓는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김동길이나 김진홍의 강연을 들을 때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그는 큰 바다위에 작은 배를 띄워놓고,

같은 고기만 잡힌다며 "이 바다는 나에게 더 이상 감흥을 주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윤치호에 대한 다른 해석에 대해서는 발끈하기까지 하셨는데

아마도 윤치호에 대한 책을 내고 지난 15년간 많은 비판을 받은

피해의식이 없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윤치호 자살론을 확산시키셨으니...

 "더이상 윤치호를 연구하지 않는다"며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입장의 변화가 없다고 거듭 밝힌 그녀도

윤치호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첨가해 개정판을 내야 했습니다.

 

적어도 인물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라면,

내가 이런 낚시대(방법론)로, 바다의 위치 어디에 찌를 내리니, 이런 물고기만 잡히더라.

그런데 다른 사람이 다른 낚시대로 다른 위치에서 잡은 물고기도 봐야

그 바다의 성격을 전체적으로 알 수 있겠다 라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지요. 

 

반면에

그곳은 같은 물고기만 잡히는 곳이라며, 추억을 향수하듯 고집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관심이 없어졌다라고 말하기엔 그동안 받았던 비판들이 너무 뼈아팠던 것일까요?

 

누군가는 또 저 깊은 바닷속을 동경하며,

새로운 생명체를 곧 잡아 올릴 것인데..

 

반응이 사뭇 궁금해집니다.

"주면 읽겠다"는 교수님께 하루빨리 그 책을 만들어 선물로 드려야 겠습니다.


 

꿈터에서 곧 나옵니다. "소설 윤치호" 와 "날조된 역사 105인 사건과 윤치호 일기(가제)"




* 저와 생각은 많이 다르시지만, 그래도 기사는 있는 그대로 써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윤치호 아닌, 김교신에게 배워야"
이화여대 양현혜 교수, 약육강식의 가치 뒤집는 것이 한국 교회 역할
 
이범진
이화여대 양현혜 기독교학과 교수가 식민지 조선사회를 살았던 윤치호와 김교신을 비교,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 조언했다.

지난 11일 ‘연구집단 카이로스’의 주최로 열린 강연에서 양 교수는 “그들이 ‘근대’라고 하는 서구문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넘어서려 했는지 살펴보면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길이 보인다”며 두 인물을 비교했다.

▲ 이화여자대학교 양현혜 기독교학과 교수     © 이범진

먼저 윤치호에 대해서 그는 “사회진화론으로 인종을 봤다”며 “이는 제국주의를 옹호할 수 있는 이론”으로 ‘기독교적 제국주의 세계관’이라고 정의했다. 제국의 침략을 문명화로 보고 그것을 기독교의 힘으로 여겼다는 것. 그래서 윤치호는 문명화 된 일본을 본받고 모방해야 할 존재로 여겼다는 지적이다.

이것이 “윤치호가 민족적 정체성을 잃고 독립운동 노선과도 결별하는 요인이 됐다”고 꼬집은 양 교수는 “105인 사건 때 억울한 옥살이를 한 후로는 강탈할 수 있는 힘만이 유일한 가치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 윤치호와 김교신
반면 김교신에 대해서는 “힘이 정의가 되는 시대에 오히려 식민지를 만드는 제국주의 국가야 말로 야만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며 망국을 경험한 기독교인의 이상적 자세로 꼽았다.

양 교수는 “약육강식의 가치를 뒤집어 보고자 한 김교신이 바로 조선산 기독교”라며 “많은 기독교인이 강자의 편에 섰지만, 그는 죽음을 이긴 진정한 기독교를 보여줬다”고 극찬했다. 또한 “조선의 전통과 기독교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그에겐 있었다”며 ‘조선산 기독교’를 설명하고 ‘전통을 무시한 윤치호’와 비교하기도 했다.

이에 양 교수는 결국은 ‘근대’와 ‘주체성’의 문제라며 “서구 근대 문명이 자랑하는 것이 ‘힘’인지에 대해서 자문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근대가 가져온 힘의 논리를 모방할 것이 아니라 비폭력적 연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여기에 바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역할이 있다며 “약자의 자존을 보존하고 그런 공동체를 이뤄나가기 위해 인간을 상대하는 신의 사랑”을 실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지식인이었던 김교신이 민중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소수 지식인 중심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민중과의 연합에 힘써야 한다”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 이날 강연은 11일 오후 7시, 서울 명동 청어람 1실에서 열렸다. 이 강연은 '연구집단 카이로스'의 공동연구 프로젝트로 신앙의 사회적 조건과 효과를 성찰하기 위해 기획됐다.   © 이범진

한편 양 교수는 윤치호의 생애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대해서는 “그의 사상은 복잡할 것 없이 매우 단순하다”며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와 설명이 있지만 내 입장은 15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일축했다.

이날 강연한 내용은 그의 저서 『윤치호와 김교신』(한울)에 터한 것으로, 1994년 초판이 나온 이래 15년 만에 개정되어 지난 12월에 출판됐다. 개정판은 윤치호의 죽음에 대해 자살로 단정졌던 초판과는 달리 여러 다른 견해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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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시타 타카오 선생님 ⓒ홍인표



키노시타 타카오 선생님을 만난 것은 약 2년전. 학과 사무실에서 종종 마주쳤었고, 스터디를 같이 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처음엔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무서웠는데...단순히 타지 살이를 처음 해보는 스트레스때문이라는 걸 안 후로는 친하게 지내고 있다. 일본인 특유의 치밀함을 보여주시는 키노시타 선생님의 학문하는 모습을 보면 참 많은 도전을 받는다. 그분의 막내아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나에게 항상 존대말과 격려를 잊지 않으신다.

지금도 그렇지만 윤치호와 관련해서는, 조만간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되지 않을까 감히 예상해본다. 그와 관련된 추리소설과 인문서적을 '꿈꾸는터'에 내주기로 약속하셨다. 같이 공부하는 '의리' 하나로 말이다. 나에게 일본어를 공부해야 한다며 자꾸 일본어 문헌을 제공해주시는데...(-_-;)...딱히 피드백이 없는 내가 괘씸하시지 않을까?

편집인이라는 직업은 이렇게.. 항상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다.





 

한국에서 공공연하게 유포된 ‘신민회’의 모습이 ‘신빙성 없는 자료’에 터하여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이는 숭실대에서 통합과정을 밟고 있는 일본인 학자 키노시타 타카오 씨다.


‘경찰조서·검찰조서’와 ‘법원 공판기록’


키노시타 씨는 지난 17일 대우재단빌딩에서 열린 한국민족운동사학회(회장 박환) 월례발표회에 참석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일제에 의한 사건조작과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보다는 피고인들의 법원 공판기록에 의거해서 신민회의 모습을 구성하는 것이 더 객관적일 텐데 한국 사학계는 정반대로 일제 관헌측이 만든 사료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민회와 관련된 사료는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당시 사건을 조사한 경찰조서, 검찰조서, 검사논고 등의 일본 관헌 측의 기록과 경성복심법원 등 공개된 장소의 공판기록이다. 현재 한국 근대사를 다루는 이들은 모두 전자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문제로 제기한 것이다.


   


근거 빈약한 1907년 신민회 창건설 “공판자료 참고 안 해”


특히 신민회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신용하의 연구는 “실질적인 근거가 없이 벌써 1907년에 신민회가 있었다고 전제를 하고 있다”며 “그가 신민회 창건 1907년 4월설을 고집하는 유일한 근거는 일제관헌측의 기록인 검찰조서를 인용한 부분”이라고 꼬집었다. 105인사건 자체가 일제에 의한 조작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조작된 사료를 근거로 삼고 있는 것.


실제로 경찰신문조서·검찰신문조서와 복심법원 공판시말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처음 유죄판결을 받은 105명중 윤치호를 제외한 104명이 고문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강제된 허위 자백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경성복심법원의 이 방대한 자료를 처음으로 이용해 논문을 발표한 것은 전 한성대 총장 윤경로였다.


이에 대해 키노시타 씨는 “윤경로는 2심과 3심 공판기록을 ‘부차적인’ 사료로 평가했다”면서 “변호인단이 경찰, 검찰조서 내용이 일방적으로 고문에 의한 자백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실제로 2심 경성복심법원에서는 1심판결이 파기되는 바가 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했다. 2심과 3심보다 비교적 부당한 1심판결 기록을 신뢰했다는 평가다. 


 

‘명치 41~42년’을 ‘40~41’로 짝지어 바꾼 의도


세부적으로 윤경로의 <신민회의 창립과정>을 살핀 그는 “이승훈에 대한 진술을 인용하면서 이승훈이 1907년 안창호에 의해서 직접권유를 받아 입회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인용문의 출처를 찾아본 결과 1908년~1909년(명치41~42년)으로 되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숫자가 낱개로 바뀐 것이 아니라 41-42라는 짝진 숫자가 또 다른 한짝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 단순한 오기가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 한 것. 


뿐만 아니라 이때 사용한 사료(韓民族獨立運動 資料集 1)의 바로 밑줄에 이승훈이 평안북도 신민회 총관임을 부정한 부분도 커트하는 등 ‘이승훈이 1907년 안창호에 의해서 직접 권유를 받아 입회하고 있다’는 주장에 곤란한 사료는 인용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광옥의 권유에 입회한 안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회원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1908년 입회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윤경로와 신용하가 신민회의 핵심적인 존재로 보고 있는 임치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대구복심법원 진술에 의하면 ‘명치 41년(1908년) 봄인가 여름경’에 안창호가 그를 찾아와 신민회 일에 진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임치정은 양기탁에게 논의하자 회계사무일 이외의 일에 관계하지 말라고 말하여 거절했다는 것이다. 또한 1908년 봄 내지 여름경에는 아직 신민회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근거도 될 수 있다.


 

구석에 주석으로 슬쩍, “억울한 피고인들 위해서라도 정성껏 다뤄야” 


키노시타씨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공판정에서 신민회 회원임을 부인했을 수도 있다는 반론에 대해서도 “지금 한국에 유포되어 있는 신민회의 모습은 총독부 경무총감부가 꾸며낸 신민회상과 꼭 같은데, 그 외에 지켜야 할 무슨 비밀이 있을 수 있느냐”며 일축했다. 


흥미로운 점은 윤경로의 <신민회의 창립과정>에서 정원범의 입회시기에 ‘1909년 3월 입회했으나 경무총감보에서 1907년이 아니면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해 입회한 것으로 됨’이라는 주석이다. 주석의 출처가 없기 때문이다. 허위자백의 가능성을 연구하기보다는 자설(및 신용하설)에 대한 불리한 이유로 공판정 피고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지나가 버린 것.

 

이를 두고 키노시타 씨는 “연구자들은 1986년 공판정 사료가 공간(公刊)된 이상 검찰조서와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진술하는 내용이 아주 판이하게 다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의무가 있다”며 “구석에 주석을 달을 뿐으로 그냥 지나갈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간 피고인들을 위해서도 이 문제를 정성껏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판진술 근거해 ‘객관적’ 신민회상(像) 만들어야
 

그는 발표중 경찰조서와 검찰조서의 신빙성에 대해서, “검찰조서는 검사의 생각에 따라 그가 취사 선택한 뒤 문답체의 글로 만들어 지는 것”이라며 당시 일본의 ‘대역사건’을 빗대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나아가 그는 이기당, 차리석, 장응진 등 대부분의 2심 공판 진술들은 신민회가 이야기만 있었지 실제로 성립되지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일제 관헌 측만이 아니라 피고인들의 공판기록을 아울러 두 가지 사료에 의거해 객관적인 신민회 모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발표를 들은 경희대 김권정 교수는 “충격적이면서도 치밀한 사료비판이었다”며 “기존 연구의 쏠림현상을 지적하고 공정성을 따졌다는 면에서 연구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발표였다”고 평했다. 


키노시타 타카오 씨는 일본에서 오랜 기간 윤치호에 대해 개인적으로 연구하다가, 고등학교 교사직을 은퇴하고 한국의 윤치호연구 권위자인 숭실대 박정신 교수(기독교 사학)를 찾아와 통합과정을 밟고 있다. 그의 연구 중 서론격인 이날 발표는, <윤치호 일기>를 통해서 더 세부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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