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수업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미션 스쿨에 다닐 때에는 딱 두 부류의 선생님들이 있었다. 갑자기 수업을 하다가 눈동자가 맑아지면서 간증을 쏟아내시며 전도하던 선생님과 그저 수업에만 열중하며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게 기독교 수업이라고 생각하던 선생님 부류 말이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주어진 수업을 들어야 할 학생들의 권리를 생각할 때면 그리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두 번째 부류의 선생님들은 기독교인이 아닌 선생님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미션스쿨’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 더군다나 학교 채플시간에 가끔 ‘신실한’ 모습이라도 보여주실 때면 ‘이중적’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정작 혼란스러웠던 사람은 선생님들 그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기독교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이런 어려움을 해결해 줄, 최근 ‘내가 사랑하는 수업’(좋은씨앗 펴냄)을 출간한 안양 백영고등학교 김태현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평소 수업 내용에 충실하면서도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해왔다. 이미 이 ‘바닥’에서는 스타 강사로 꼽히는 그를 찾아 직접 학교로 향했다.
10년 만에 가보는 고등학교, “만남과 사귐”이라는 급훈이 우리를 반겼다.
| ▲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있다. © 윤동혁 | |
● 책에 공을 많이 들이신 것 같다. 만들게 된 계기는?
올해 2010년에 기독교사대회가 있었어요. 그 대회에 맞춰서 책을 내게 됐어요. 제가 주제강사였거든요. 요즘 수업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아요. 수업이 굉장히 화두인데, 기독교사들도 약간 이원론에 빠진 그런 게 있었어요. 기독교사들이 학교 수업에서 직접적으로 전도하는 것이 전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죠. 반면 학급경영을 잘 하는 게 곧 전도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죠. 그러나 정작 수업에서는 기독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양쪽으로 치우쳐 져서는 안 되죠.
그러다가, 이제 1998년부터 기독교사 운동이 시작됐는데, 이 운동이 10년을 거쳐오면서, 우리 기독 교사들이 기독성을 어디서 발휘할 것인가. 말하자면, 교육 정책, 수업, 교육과정, 학교만들기 등 이런 것에 관심을 쏟게 됐죠.
다행히 제가 이제 좋은 교사 저널에 4년 넘게 ‘김태현의 기독교적으로 수업하기’라고 해서, 연재를 했죠. 이것이 모여서 이번 책이 나온 거죠.
기독교 정신은 수업속에 녹아들게,
복음과 수업 통합하는 실험
음악은 물론, 수학도 가능
● 그렇다면 ‘기독교적 수업’이란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사실 긴장이 있잖아요. 공교육에서의 기독교적 수업이라는 것이 뭘까? 수업 잘하고 애들 따로 모아서 전도하는 것이 기독교 수업인가?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접근을 했죠. 교과 지식 자체가 좀 재해석을 다시 해야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니깐,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만들었을 때는, 의미와 목적이 있는데, 아시다시피 교과서에 기록된 진술은 굉장히 객관적인 정보의 나열이잖아요.
예를 들면, 직유법과 은유법을 우리가 배운다면, ‘~처럼, ~듯이’가 들어가면 직유법이고, 은유법은 ‘내 마음=호수’ 이런 식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어가 가지는 의미와 목적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언어 형식 중에 수사법을 준 이유가 더 깊은 표현을 하기 위해서 준 것이거든요. 깊게 만나라고, 예를 들면 “우리 기자님은 장동건처럼 멋있어요” 할 때 장동건이라는 매개언어가 이 사람의 속성을 더 구체화 시켜주거든요. 이렇게 수사기법을 사용하게 되면, 의미가 이질적이지만, 거기서 생각을 하게 되고 의미를 풍요롭게 만들게 하는 그런 수사기능이 있는데, 그런 의미들은 다 제거되어 있죠. 제거되어 있으니깐 기독 교사는 교과 지식 속에 있는 숨은 의미들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교과서 기술 되지 않은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복원해줘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사란 수업 영역에서 얘기를 했을 때는 창조세계의 비평가여야 한다는 거죠. 누군가 어떤 현상을 비평해줄때,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될 수 있거든요. 학교 수업이 왜 지루하냐, 바로 이거거든요. 교과서 속의 지식이 의미와 목적이 상실되어 있거든요. 지식의 파편화라고 할까요. 게다가 여기에 ‘입시’가 들어오는 거예요. 외우고 저장하고 그러니까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도약을 못하고 죽은 지식만 저장하는 거예요.
● 수업 중에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요?
창세기1장을 보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얘기 하고 있거든요. 기독교사는 수업 속에서 그 기쁨을 맛보게 하는 거예요. 그게 일반 은총 가운데 가능하잖아요. 얼마든지 공교육에서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맛보게 할 수가 있는 거거든요.
1차적으로 기독교사는 수업시간에 그런 창조의 기쁨, 세계의 의미와 목적 그러면서 배움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것. 이런 것이 기독교사가 수업속에서 발휘해야할 영성이라는 거죠.
그리고 나서, 이제 수업 속에서 교과 속에서 아이들에게 영적인 질문을 던질 수 가 있어요. 그러면서 아이들을 영적인 공간으로 초대를 하는 거죠. 그래서 아침 기도 모임이라던가 점심 기도 모임이라던가 아님 지역 교회 예배로 초청을 해서 아이들에게 더 강력한 복음을 전할 수가 있게 되는거죠.
● 수업 속에 거의 녹아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네요.
기독교 학교가 문제가 뭐냐면, 겉으로는 예배를 드리고 그 수업의 교육 과정과 철학들을 완전히 기독교 교리를 잣대로 평가하고, 그러면서 기독교 학교가 서울대 몇 명 갔다느니 뭐니 하면서 현수막은 제일 먼저 걸어요. 이게 과연 기독교 학교인가 하는 거죠. 그렇지 않다는거죠. 복음과 수업을 통합하는 시도가 필요하고 절실하죠.
| ▲ 굳이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교육이란 것 자체가 창조세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 윤동혁 | |
●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객관적이어야 할 수업속에서 기독교 정신이 발현된다?
수업이라는 것을 교육 차원에서 본다면, 창조세계를 복원한다는 거죠. 굳이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세계 속에 있는 의미를 복원 시켜주는데 목적을 둔다는 거죠. 그게 교육으로서의 수업인 거죠. 그니깐,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잖아요. 그 창조세계의 의미를 가르친다는 거죠. 그건 굳이 중생의 경험이 없더라도 우리가 얼마든지, 일반 은총 가운데 아이들과 접촉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거죠. 그게 이제 교육으로서의 수업인거죠.
선교로서의 수업은 창조세계의 의미 목적은 부차적인 것이고, 일단 중요한 것은 영혼 구원이죠. 수업에 들어가셔서 일단 수업은 기본적으로 하고, 그리고 나서 수업시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장으로써 생각하시는 선생님들이 계시죠. 그런데, 이런 것들은 약간 배타주의로 흐를 수 있죠. 수업시간에 기도를 한다던가, 찬양을 한다던가 하는 아니면 수업을 하다가 책 덮어 한담에 복음을 전하시는.. 그러시는 선생님들 있죠.
제 입장은 이 두가지가 통합되어야 한다는 입장인거죠. 그런데 통합이지만, 제 기본추는 교육으로서의 수업에 있어요. 제가 원하는 것은 소통형 수업으로 교육을 목적으로 하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관점을 재구성하는 거죠. 일반화된 언어로요. ^^
●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수업은 학습point가 다른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인데요. 학습자 중심의 수업은 이제, 진리는 상대적인 것으로, 진리는 학생들이 구성하는 그 지식이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구성주의라고 하죠. 개인의 주관화된 느낌과 경험을 얘기하죠. 그래서 학습자 중심의 수업은 어떤 가치나 절대진리를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을 꺼려하죠. 교사는 안내자로서의 역할만 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구성하게끔 창의적인 발문 토의 토론 학습 이런 것들을 하는 거죠. 물론 그렇게 하는 과정은 중요한데,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건 좀 문제가 되죠. 우리는 진리가 있잖아요. 애들이 스스로 절대 진리에 대해서 상대화시키다 보면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대답이 나올 수 있거든요. 그런데 학습자 중심의 교육은 아니다라고 말하지 못해요. 그저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하는거죠.
그런데 기독교 수업은 진리가 있어요. 그 진리를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인격적으로 알아가게끔 하느냐 하는 거죠. 학생들의 보는 관점에서도 학습자 중심의 교육은 학생들을 신으로 보거든요. 전능자로 보는 거죠. 너는 할 수가 있고, 깨우칠 수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기독교적인 교육에서의 관점은 ‘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신적인 부분을 가졌으나, 타락한 존재라는 거죠. 그러면 타락한 부분을 올려와야 한다는 거죠.
● 수업 중에 영성의 공간을 만드신다는 말씀과 이어지네요. ‘나, 너, 사랑, 세상’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요. 실제로 이렇게 영성의 공간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을 고백하는 혹은 하나님을 느끼는 학생들이 있었나요?
수업에서는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알리기가 힘들죠. 중요한 것은 일반은총 가운데 있는 부분만 일단 이야기 하는거죠. 일반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데 거기서 어떤 지점이 있냐면 영성이 있는 지점을 만들어내야 하잖아요.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지점들을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는데, 일단 지식이라는 것이 그냥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실재가 있다. 이거죠. 예를 들면은 우리가 욕을 듣기 좋아하느냐, 아름다운 용어 칭찬 같은 용어를 좋아하느냐 사실 칭찬을 듣기 좋아하거든요. 그 왜그러냐 그거죠. 그것은 인간 본연의 마음 가운데 그것을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 거거든요. 이런 아름다움 같은 가치를 주는 배후자가 있다라는 거죠. 이런 식의 접근을 하는 거예요.
수학을 봐도, 수학에서는 보이는 세계를 기호로 이야기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규칙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허수를 만들어야지 풀어지는 문제가 있어요. 이것은 뭘 의미하냐면, 우리가 눈에 보이는 객관적 세계 외에도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세계가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거든요. 이런 식의 접근을 한다는 거죠. 그리고 나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얘기 하기보다는 이것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따로 찾아던 혹은 아침 기도 모임에 나와라 하는 식으로 접근하죠. 수업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막 선포하고 그런 자리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세계, 혹은 또 다른 지적인 신, 창조주가 있음을 암시하고 또는 명시적으로 얘기를 하면서 아이들을 계속 내가 섬기고 있는 영적인 곳으로 초대하는 거죠.
그러니깐, 수업에서는 아이들이 느끼게끔 하는 거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구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을 들게 하는거죠. 실제로 우리 아침 모임에 안믿는 애들 많이 와요. 그리고 여름방학 때, 창세기 논술이 있어요. 거기서도 안믿는 애들이 와서 와 신이 있구나 하고 이런걸 인정하는 가는거죠. 고민을 계속 던져주는 거죠.
● 영적인 공간을 마련하는데 있어 환경이 많이 어려운 점이 어떤 것이 있나요?
교육문화죠. 교육의 타락한 문화. 아이들도 참 이중적이예요. 좋은 수업을 원하지만 입시를 또 책임져줘야거든요. 그런데 이제 어느정도는 통합이 돼있어요. 처음엔 많이 힘들었죠. 그런데 지금은 지혜가 좀 생겼다고 할까요. 기독교적인 수업으로 아이들과 동료교사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요. 평가의 문제 동료교사와의 마찰, 학생들의 어떤 불만족스러움 같은 것들이죠. 이런 것들을 해결하는 게 초창기에 문제가 좀 있었죠.
그런데 사실 지금은 가장 기독교적인 수업을 할 때, 가장 좋은 수업이 돼요. 왜냐면 기쁨을 맛보게 하잖아요.
● 국어 수업을 담당하고 있어서, 더 유리한 부분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국어에 있어서도 기독교적인 수업은 그 의미를 복원해주는 거예요. 김춘수의 ‘꽃’ 시처럼 이름을 붙여서 의미를 알게 해줘야 한다는 거죠.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수학에서도 가능합니다. 직접적이지 않아서 그렇지요. 음악 수업같은 경우 기독교적 수업이 아주 좋습니다. 그동안은 수업시간에 그냥 외웠잖아요. 밝은 노래는 장도 슬픈 노래는 단조, 이거는 뭐냐면 인간이 가지는 본연의 감정이 두 가지가 있다는 거죠. 슬픔과 기쁨. 그런데 그것을 노래로 표현했다는 것은 노래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거든요. 학습된 것이 아니라, 노래를 들으면 그렇게 치유가 되요. 슬플 땐, 치유가 되고 기쁠 땐 기쁨이 온다는 거죠. 그것은 뭐냐면 노래 자체 리듬이 우리 언어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거죠. 이런 음악적 리듬이라는 건 누군가가 줬다는 거죠. 학습 받은 결과가 아니라는 거죠. 벌이나 동물들은 음악이 없잖아요. 이렇듯 음악이 가진 의미가 복원이 되죠. ‘즐거운 나의 우리집’을 단순히 외우고 박자 맞추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노래를 어머니께 불러주고 가정에서 부르면서 집의 가치 그 의미를 깨닫는다는 거죠.
모든 세계 속에서 의미들이 있는데, 그 의미들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직장 생활에서는 힘든데 교회 가면 좋아해요. 근데 그거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직장 생활도 즐거워야 하거든요. 그것을 알려주는 거죠. 수업시간에는 어떤 곳에서든 의미를 찾을 수 있게요.
올해 냈던 책 ‘큐티로 논술하기’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애들은 큐티와 공부가 연관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큐티 자체가 공부거든요. 애들은 큐티 할 때, 감 오는 것만 하잖아요. 그런데 말씀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잖아요. 말씀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고 나름대로 의미를 정의해보는 것 그게 언어영역 시험하고 똑같거든요. 논술 영역하고도요. 통합시켜 주는 거죠.
수업후 하나님 궁금해서
아침 큐티 모임에 참석하는 학생들,
적극적인 소통이 관건
● 수업하시면서, 이 방법에 관해서 확신을 가지실 것 같은데, 기억나시는 구체적인 사례나 반응들이 있다면?
가장 기분 좋았던 소리는 이거예요. 교회 다니는 애들 입장에서는 하나님 주신 언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알게 됐다. 언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에 대해서, 언어라는 것이 그냥 내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이 삶 속에서 미치고 있는 영향과 그 의미에 대해서 잘 알게 됐고, 그 언어를 주신 하나님에게 찬양했다라는 이런 고백이 나왔을 때 참 고맙고 의미가 깊었어요.
또 일반 애들한테는 마찬가지죠. 언어라는 것이 참 단순한 도구적인 것이 아니구나, 삶과 문화를 지배하는 그런거구나, 그리고 문학 작품을 볼 때, 단순히 감상 위주의 분석이 아니라 그 사람과 만난다는 것이 뭔지를 알겠다고, 이런 것들을 깨닫는다고 할 때 참 기분이 좋죠.
그래서 아이들에게 글 어떤 언어적인 능력이 부각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표가 된다고 생각을 되거든요. 저는 결국 수업에서 나와의 만남과 너와의 만남, 세계의 만남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왜냐면, 기독교적인 앎이라는 것은 좀 달라요. 안다라는 것은 정보를 저장하는 건데, 우리의 앎이라는 것은 ‘야다’ 남녀가 성적으로 정신적으로 연합하는 의미, 인격적인 의미거든요.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라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결단의 소망도 있는 것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우리 수업에서 안다라는 것은 그것을 통한 뭔가의 삶의 변화를 이뤄낸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했을 때, 제 수업에 대한 의미들이 많이 생겨난다고 생각하는 거죠.
● 그러나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이고, 그런 모든 것들을 수업에 적용하기에는 운신의 폭이 좀 좁으실 것 같다. 공립학교에서 하지 못하는 것들이지만, 밖에 나가서는 하고 싶으신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대안학교 선생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달라.
그렇죠. 여기는 한계가 있죠. 왜냐면 소통해야 하니까요. 어떤 욕심이 있냐면요. 정말 구속의 영성과 창조의 영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기독 제자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물론 이거는 약간 고지론적인 접근일 수도 있는데, 정말 이 세계를 잘 이끌 수 있을 만한, 영성과 지성과 감성이 충만한, 그래서 앎과 삶이 통합되고 교회와 세상을 연결하는 그런 균형잡힌 인재를 키우고 싶은 욕심이 있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하고 있는 수업은 좀 답답한 감이 있죠. 이렇게 하려면 통합된 수업이 필요하거든요. 하나님이 이것을 왜 만들었을까 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토의하고 그런 것도 필요하죠. 중생을 경험하지 못하고는 말하지 못하는 비밀들이 있잖아요. 그런 영적인 비밀들을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죠. 그니깐, 교육적인 수업도 중요하지만, 계속해서 선교적인 수업도 중요한거죠. 이런 것들으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업하는지 궁금하다. 하나만 예를 들어 달라.
국어 수업 같은 경우에 윤동주의 서시를 통해서, 일반 교사라면 입시 위주에 문제를 푸는 접근을 하겠죠. 그런데 저는 기독교적인 접근을 하죠. 시라는 것은 하나님 주신 산물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세계를 노래하고 나와 만나는 산물이라는 거죠.
서시를 딱 보니깐, 윤동주가 하나님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하나님과의 만남을 얘기하는 것 같아요. 고난이 있지만, 끝까지 별을 노래하는 마음, 어떻게 보면 신앙일수도 있거든요. 즉, 서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를 만난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면 우리 애들 가운데서도 이 서시를 통해서 세계를 만나고 나와의 만남을 가질 수 있게 해줘야거든요.
그러고자 하면, 이제 처음으로 윤동주의 삶을 이야기 하면서 이 서시가 윤동주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 서시를 썼을 때의 마음을 체험하게 해주는 거죠.
사실 이 시가 2학기 첫 수업이거든요. 이제 이 서시를 가지고 2학기 첫 생활을 시작하는 시로써 너희들이 패러디를 해봐라 하면서 이렇게 연결을 하는 거죠. 그러면 이런 방법이 더 창의적이고 아이들이 서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거죠. 게다가 다행히도 수능 문제에서는 단편적인 지식보다는 이런 것 같은 의미와 삶의 맥락을 묻거든요. 그러면 아이들의 사고를 계발하게 되니깐 아이들에게도 더욱 도움이 되는 거죠.
어떤 머리를 빡빡 깍은 아이가 있어요. 이 아이가 서시를 썼어요. 기억이 잘 안나지만, 자기가 “머리를 빡빡 깍았지만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수군거리는 소리에 나는 괴로워 했다. 하지만 나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이 신념을 끝까지 지켜가야겠지. 아직도 다른 아이들은 내 머리를 가지고 수근거린다.”
이런 식으로 썼어요. 그러니깐 이렇게 서시를 통해서 자기와 만난거죠. 자기가 머리를 삭발한 의미를 넣고 시를 통해서 자기와 만난거예요. 이렇듯 시가 가진 본연의 가치가 살아나게 된거죠. 하나님은 이런 수업을 원한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주신 시의 의미가 있는데, 그 의미를 복원시켰으니깐요. 여기서 더 나아가면 영적인 공간으로 초대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이끌어 낼 수 있겠죠.
● 선생님에게 제자들은 어떤 존재? 제자들은 선생님에게 어떤 존재?
하나님의 형상이죠. 동시에 우리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자죠. 지도자였으면 좋겠어요. 최소한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기쁨을 누리는 사람. 저는 약간 좀 선교단체 간사를 해서, 자꾸만 이렇게 제자 양육하려는 의도가 있어요.
그리고 제자들은 열정있는 선생님 그리고 좀 비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조이메이커, 웃기는 사람이요.
| ▲ 결국 자녀의 양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어요. 좋은 선생을 만나서 인생이 바뀌는 사람이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또 부모의 헌신과 사랑이 있어요. © 윤동혁 | |
무상급식 찬성하지만
정치적 이용 안했으면,
학생들 교정위해 '적정' 체벌은 필요
'적정선'은 고민해봐야
● 요즘 무상급식, 학생 인권 전반적으로 교육 이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일단 무상급식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찬성을 하죠. 그 취지가, 불평등에 대한 해소니까요. 그런데 무상급식을 정치적으로 자꾸만 이용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상급식을 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옳다고 생각해요. 다만 무상급식만 해결한다고 해서 불평등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학교 복지가 전반적으로 개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학생 인권은 존중을 해야죠. 그런데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과정은 공동체적 합의는 잘 안된 것 같아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히 학생인권을 존중하고 체벌도 금지해야 하는데, 저는 간단하게 체벌은 해요. 수업시간 말고 담임으로서는 손바닥 한 대 정도는 해요. 그런데, 너무 체벌을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체벌에 대한 개념을 좀 재정의 해야 할 것 같아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은 하고 있는데, 명확하게 개념을 잡기는 좀 힘들더라고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학생들은 죄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교정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할지는 생각해봐야겠죠. 예수님도 성전에서 장사하는 상인들 식탁을 뒤집어 엎으셨는데, 그것이 체벌의 정당화는 아니지만요. 물론 체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단점은 있죠. 일단 기본적인 취지는 찬성을 해요.
● 사실 학원 강의(지식중심·독선·배타적)에 안전감-안도감을 느끼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많다. 이들에게 한 말씀.
중요한 것은 공부를 왜 하느냐는 거죠. 기독인들에게요. 공부 속에는 항상 배움의 기쁨이 있어야거든요. 그런데 공부가 기쁘지 않으면 아이들이 욕을 하게 되어 있어요. 왜 욕을 잘하냐면요. 세상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있기 때문이예요. 재미가 없거든요. 기쁨이 없고요. 그런데 그런 온라인 강의들이.. 물론 온라인 강의를 듣기는 들어야 돼요. 그것만 들어서는 안된다는 거죠.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결국 만남과 사귐이거든요. 나와 만나고 너와 만나고 세계를 만나고 하나님과 만나는 그런 관곈데 그런 것이 사라졌을 때, 남은 것은 세속주의 성공주의. 이런 거거든요. 욕망만 남은거죠. 그런데 그런 것이 과연 기독인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죠. 기독교인이라면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막아야 한다는 거죠. 학원 강의를 절대 듣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왜 공부를 하느냐의 의미를 묻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고 그 가운데에서 전략적으로 학원 강의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는 거죠.
만약 학원 강의와 온라인 강의만 들은 학생이라면 굉장히 폐쇄적이라는 거죠. 배움이 공부보다 앞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움이 공부보다 앞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 가정에서 학생들에게 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가정에서는 일단 거실 앞에 TV를 치워야 해요. 공부를 하라고 해놓고 가장 사람들이 많이 앉는 거실 앞에 TV가 있는 것은 문제가 있죠. TV 속에서 이뤄지는 세계는 거짓의 세계거든요. TV를 보더라도 WHY?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이 프로그램을 보는가 하는 그런 질문이요. 보고 즐기기는 것보다는 생각을 하며 자기가 주도를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거실에는 책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으로, 가정 가운데 건설적인 대화와 토의와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생과 부모님들이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 그런 고차원적인 대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유대인들의 밥상머리 공동체의 핵심은 바로 ‘대화’거든요. 진실한 대화. 그런데 오히려 기독인들이 대화를 많이 안하는 것 같아요. 그 대화를 많이 하려면 가정의 문화가 독서의 문화, 매일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한번쯤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나눔을 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정의 문화가 중요하다는 거죠.
이렇게 가정의 문화를 통해서 아이가 가정에서 충전이 되어야 해요. 사실 가정에서 방전된 아이가 무너진 아이가 학교에서 충전되기는 힘들거든요. 일대 다수잖아요. 결국 자녀의 양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어요. 좋은 선생을 만나서 인생이 바뀌는 사람이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또 부모의 헌신과 사랑이 있어요.
그래서 가정의 문화 아이들을 충전시키는 기독교적인 가정의 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덧붙여서 무엇보다 제발 책을 읽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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