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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악함을 솔직하게 드러낸 그의 일기장때문에…
윤치호에 푹 빠진 키노시타 타카오 씨


“한국에는 윤치호와 관련된 기적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친일파’라고 매도당할 것을 알고도 일기를 공개한 유가족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방대한 자료를 윤치호가 ‘친일파’임을 밝히는 데만 사용한 한국학계이죠.”


키노시타 타카오 ⓒ김승범

 
도쿄의 한 도립고등학교에서 40년간 영어를 가르쳤던 키노시타 타카오(65)씨는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윤치호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일상에 지친 그에게 윤치호가 남긴 일기 11권은 일종의 은신처였다. 잠들기 전에 한두 시간씩 일기를 읽고 자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은퇴 후, 윤치호에 대해 더 제대로 알고 싶어 한국에 왔다. 공부할 곳을 찾아다녔다.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할아버지를 흔쾌히 받아주는 학교는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찾은 곳이 숭실대 기독교학과였다. 윤치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기독교학’을 공부해야 했다. 다행히 지도교수인 박정신 교수는 <윤치호 일기>의 일부를 번역하기도 한 터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키노시타 씨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됐다. 정확히 4년 전의 일이다.

지도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날 일본인 할아버지가 와서는 공부가 하고 싶다고 했어요. 우리 학교는 기숙사가 없기에 다른 큰 학교의 교수님을 소개해줬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에서였는지 거절을 당해서 다시 돌아왔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죠.”

4년이 지난 지금, 키노시타 씨는 올 8월 박사 학위 취득을 앞두고 있다. 신민회에 대한 연구로,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바꿀 수도 있는 큰 성과를 냈다.(박스기사 참조) 그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자취방을 찾았다.

“여름이라 방에 벌레가 많습니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유창하다. 젊은 시절부터 한국어에 관심이 많아, 소설을 즐겨 읽었다. 윤치호와의 인연도 광화문 서점에서 시작됐다. 우연히 <윤치호 일기> 국역본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키노시타 타카오 ⓒ김승범

 

제일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이면 윤치호였나요? 그는 ‘친일파’ 아닌가요?
“윤치호를 공부하러 왔다고 하면 한국인들의 반응은 너무 분명했어요. 친일파에 대해서 왜 연구까지 하느냐는 거였죠. 한국에는 윤치호와 관련된 기적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친일파’라고 매도당할 것을 알면서도 일기를 공개한 유가족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방대한 자료를 윤치호가 ‘친일파’임을 밝히는 데만 사용한 한국학계이죠.”

<윤치호 일기>는 권당 약 300~350쪽 분량으로 총 11권이다. 당시의 시대상은 물론, 한 인간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식민지 조선의 시대상은 물론,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 신앙에 대한 고민이 발견된다. 한문, 한글, 영문으로 되어 있는 그의 일기는 현재 3권까지만 번역되어 있다. 자신만 아는 암호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일기 전체를 읽지 않고는 해석되지 않는 부분들도 많다. 윤치호 연구가 부진한 이유 중의 하나다. 일부 연구자들이 확인되지도 않은 그의 ‘자결설’을 사실인 것처럼 적어 유포한 게 아직도 널리 퍼져 있는 현실이다.

윤치호가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의 회복과 근대화를 꿈꾼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제시대 후반으로 가면서 ‘노골적인’ 친일을 보였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을 추앙했다는 평가도 있고요.
“윤치호는 당시 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했던 조선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 학자들이 윤치호를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나쁜 예로 언급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사실 당시 일본 측이 느끼는 존재감을 고려하면 그만한 인물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스케일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일제가 사회 참여적인 기독교 세력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꾸민 ‘105인 사건’에서도 결국 유일한 희생자는 윤치호 한 명뿐이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당시의 윤치호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가 무조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이 너무나 많기에 저는 한국에서 윤치호 전도사가 되려고 합니다.”

키노시타 타카오 ⓒ김승범



키노시타 씨가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것도 모두 윤치호 때문이다. 윤치호를 통해 접한 기독교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윤치호는 자신의 약함과 추악함을 일기에 그대로 적어나갔어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요. 부족함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나님 앞에 서요. 그런 진실한 모습이 다 일기에 쓰여 있어요. 기독교가 이처럼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것을 용서해주고, 받아들여 주는 종교라면, 누구나 믿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약하고 못된 자신을 다 털어놓는 그의 일기는 저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 직접 한국에 와서 본 기독교의 모습은 어땠나요?
“목사님들이 모두 말끔한 양복을 입고 다니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부르주아의 종교가 아닌가, 지식인들의 종교가 아닌가 생각했던 적도 있고요. 여기저기 많은 교회를 소개받아 다녀봤는데 아직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했네요.”

그는 이번 여름, 일본에 돌아가 <윤치호 일기> 일본어 완역본 출판 작업에 들어간다. 유명 출판사와의 계약을 앞두고 있다.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완역본이 나오게 됐다. 키노시타 타카오 씨의 20여 년 열정이 일궈낸 결과다. 한국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정체된 한글 완역본 출판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키노시타 씨는 자신이 윤치호를 접하고, 한국에 와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윤치호가 만났던 그 하나님이 인도한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아직 ‘기독교인’이 아니다. ‘믿음’을 결단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할 게 많다. 담배도 그중에 하나라는 그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헤어질 때 이렇게 인사한다.

“다음에 올 때는 내가 ‘기독교인’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쉽게 믿고, 쉽게 버리는 이 시대에, 그의 오랜 고민과 갈등을 응원한다.


※ 윤치호는 누구?
1865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97년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1989년 제2대 독립협회 회장이 되었다. <독립신문> 사장과 만민공동회 회장을 맡았다. 그러다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의 친일행위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친일파’로 낙인찍혔다.



 

 

국사 교과서 바꿀 충격적이고 치밀한 연구

<윤치호 일기>는 1883년 1월 1일에 시작해 1943년 10월 7일에 끝나는 60년의 긴 기록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1906년 7월 4일부터 1915년 12월 31일에 이르는 약 9년 반 동안에는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 기간의 정중앙에 바로 ‘105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연구함으로써 일기의 공백을 메우겠다는 게 키노시타 타카오 씨의 목적이었다.

논문 제목은 ‘105인 사건과 청년학우회 연구’. 지금까지의 신민회 연구가 회고록이나 당시의 경찰, 검찰의 자료를 기준으로 진행되었다면, 키노시타 씨는 여기에 복심법원 공판경위서나 일본 측 자료를 이용해 더욱 객관적인 신민회의 모습을 그려냈다. 결론적으로 신민회는 ‘105인 사건’을 날조하기 위해 쿠니토모 및 총독부가 ‘청년학우회’에 덧씌운 이름이었음을 밝혀낸다. 사회 참여적인 평신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족운동단체 청년학우회가 신민회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정설로 굳어 국사 교과서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1907년 조직된 거대한 항일 비밀 결사’라는 표현과 회원 수가 800여 명이었다는 등의 설명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된다. 신민회 연구의 권위자를 비롯해, 이 논문의 심사를 맡은 외부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키노시타 씨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학술대회와 책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해질 예정이다.

지도교수인 박정신 교수는 “한국인들도 하지 못한 일을, 일본인이 직접 찾아와 연구해주어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이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김권정 경희대 교수도 “충격적이면서도 치밀한 연구”라며 “연구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논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글·인터뷰 / 이범진 편집장
키노시타 타카오씨의 논문은 꿈꾸는터에서 곧 출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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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식인, 조선 기독교 설득에 고심
당시 일본 측 "관헌의 위력으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어려운 문제"
 
이범진
식민지 시대 경성일보(4대)와 매일신보(3대)의 사장을 맡았던 ‘아베 미츠이에’(이하 ‘아베’)가 당시 조선 기독교의 지위를 인정하고 그 중심 세력들과 항상 접촉하려 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정신문화연구>(2010년봄호)에 실린 심원섭(인하대 BK21 연구교수)의 연구논문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의「아베(阿部)무불옹(無佛翁」을 추모함」>에서 밝혀진 것.
 
연구자인 심 교수는 “매일신보 감사 및 경성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던 나카무라 겐타로가 아베의 사망 직후인 1936년 1월 14일부터 17일까지「아베 무불옹을 추모함」이라는 장문의 추도문을 <경성일보>에 연재 발표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며 아베의 조선 관련 행적들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전했다.
 
이는 기존에 이광수와 관련해 알려진 아베의 행적 중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담고 있어, 이를 요약 소개하고 번역문 전문을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아베가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계 전반에 걸쳐 유화적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는 점은 이 추모문에서 새롭고 분명하게 제시된 것이다.
 
아베와 불교, 천도교와의 관계를 설명한 심 교수는 기독교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기독교와 관련해서도 아베는 종교적 관심은 없었던 것 같으나, 윤치호와의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당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가 요구하는 각종 문제들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면모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관헌의 위력으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어려운 문제’ 중에 하나로 여겨진 것이 재차 확인됐다. 추모문이 아베를 “조선의 기독교의 지위를 인정하고 그 중심 세력이었던 바인 원로 윤치호씨 등과도, 항상 접촉하여 고유를 거듭하였으며, 이 인물들을 통하여, 혹은 그 불평을 듣고, 혹은 위로하는 등 축적된 불평불만을 제거하기 위해 고심한” 사람으로 묘사한 것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한편, 추모문을 쓴 겐타로는 천도교의 민족운동을 막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대목도 있어 흥미롭다. 아베가 일본으로 떠나지 않았다면 1919년 독립운동(3.1운동)에서 천도교의 참여를 미연에 방지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점이다. 당시 300만 신도를 갖고 있던 천도교의 위협을 통제하는 힘이 아베에게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이어 3.1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조선에 온 아베가 옥중에 형기를 마치고 나온 이들을 “‘덕화(德化)’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의 ‘덕화’는 순전히 일본인의 입장으로, <윤치호 일기>에도 아베가 찾아와 총독을 방문하라고 ‘충고’한 내용이 발견되는데 조선인 입장에서는 ‘감시’였다.
 
어쨌든 해당 사료는 아베의 최측근이 그를 추모할 목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식민지를 정당화하는 입장이 농후하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에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 다음은 추모문 중 기독교와 관련된 부분
 
六. 옹과 기독교

옹은 전술한 바와 같이 불교의 부흥에 열심히 31본산 주지와의 접촉을 긴밀히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샤크소엔, 미야지 소카이 등의 선사로부터 선을 배우며 스스로 불교도로서 임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그를 배척하는 자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옹은 결코 기피나 배척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선의 기독교의 지위를 인정하고 그 중심 세력이었던 바인 원로 윤치호씨 등과도, 항상 접촉하여 고유를 거듭하였으며, 이 인물들을 통하여, 혹은 그 불평을 듣고, 혹은 위로하고, 혹은 그 □를 논하는 등, 축적된 불평불만을 제거하기 위해 고심한 것이었다. 이렇게 옹은 관헌의 위력으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어려운 문제도, 이런 과정을 통해 해결하는 그런 식이었다. 이렇게 옹이 각 방면의 조선인사와의 가운데에 개입하여 일심으로 내선융화의 촉진에 매진한 것은 참으로 옹의 애국심의 발로였다. 옹의 경성일보 사장으로서의 존재는 겨우 4년에 지나지는 않지만, 그 걸출한 공정에 이르러서는 실로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바로서, 그 수확도 결코 근소하지 않았던 것이다. 옹은 조선을 떠난 후에도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하는 면에 있어서 극히 적극적이었다.
‘아베 무불옹을 추모함’ 역문 中에서, <정신문화연구> 제118호·2010년 봄호,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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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의 아들도 동시에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아버지와 달리, 그는 '친일' 혐의다.

 

1939년 10월16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안중근 의사의 아들 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 분키치를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했다는 혐의다. 이토 위패에도 분향했다는 것이다.

 

너도 나도 이를 두고,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한국에는 좌파도 없고, 우파도 없고 민족주의만 있다."는 말이 있다.

쉽게말해 <한겨레>도 <조선일보>도 똑같이 민족주의란 말이다.

 

그렇게 비판하는 그들은

도대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의문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 어떻게 사는지 둘러보라.

일본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 '친일'이라 하였더라도 나는 안중근의 아들이 이해가 된다.

 

아버지를 기준삼아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나,

민족주의적 기준을 들이대 '친일'이라 매도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독립운동가 자녀의 심정을 알리 없다.

 

꼭 민족을 위해 죽어야 옳은 것인가?

민족이란 것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준 보편적 선(善) 보다 앞서는가?

 

나는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 대학 등록금 무료, 인간의 안녕을 돕는 보편적 선을

지금의 이 정부보다 더 잘 추구하는 나라가 이 땅을 접수(구원)한다고 하면,

민족을 배반하고 그 나라를 지지할 것이다.

 

그럼 나는 '잠재적 친일파' 인가?

 

안중근의 아들에겐. 민족도 일본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족의 안녕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겠지 않았는가.

안중근의 손녀와 손자가 이 땅을 밟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민족을 초월해 가족의 '보편적 안녕'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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